고흐는 암담한 현실을 극복할 색을 찾았다, 그것은 노랑
입력
수정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과수원 꽃나무에 색이 바랬다. 꽃잎이 시드니, 공허감이 밀려왔다. 아를에 있는 고대 유적이나 알프스 절경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고흐에겐 새로운 주제가 필요했다. 그때 하필 그의 생각과 편지, 펜과 붓에 고향 추억들이 넘쳐났다.
향수 어린 고향 들녘“나는 계속해서 고국을 추억한다. 갑절의 먼 거리와 지나간 옛 시간을 휘젓는 기억에는 비통함이 담겨 있다.”
고향이 그리워 슬픈 것을 ‘고향-향(鄕)’과 ‘근심-수(愁)’를 써서 ‘향수’라고 한다. 영어로는 노스탤지어(nostalgia), 그리스어의 ‘귀향(nostos)’과 ‘고통(algos)’의 합성어다. 멀리 프랑스 남부에 있는 고흐는 지금 향수에 젖어 있다.
온 동네를 어슬렁거린 보람이 있었다. 십자가 모양으로 교차하는 운하들에서부터 그 운하들에 수문을 댄 물방앗간에 이르기까지 가로수 길은 지평선으로 사라지고 벌판은 바다까지 황무지처럼 뻗어 있었다. 아를 남동쪽으로 부크 항까지 론 강을 48km까지 이어 주는 운하였다. 그 위로 활처럼 펼쳐진 하늘은 고향의 정경 그대로였다. 갈대밭과 빨래터는 고향의 들녘과 웅덩이를 떠오르게 했다.시원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운하를 따라 가로놓인 십여 개의 다리 중에 유독 하나가 강렬했다. 배가 지날 때는 시끄럽게 삐걱거리며 중앙에서 갈라져 양쪽 강둑으로 솟아올랐고, 배가 다 지나가면 다리는 다시 내려왔다. 마치 배가 몰고 오는 물결만으로도 아주 정확하게 길을 터주는 것처럼 거대한 목조 구조물 전체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신기하게 보았던 이엽식(二葉式) 도개교였다. 실제로 이 다리는 네덜란드 방식에 따라 세워진 것이었다.
고흐는 바짝 붙어 있는 강물과 황혼을 배경으로 다리를 바라보았다. 운하 양쪽에서 각각 다리를 그렸는데 북쪽에서는 다리지기인 랑글루아의 집 앞에서 작업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붙여 랑글루아 다리(Ponte de Langlois)라고 불렀다. 고흐는 시각틀과 데생 연필을 가지고 한 달 동안 이 다리를 찾았다. 이 다리를 주제로 유화, 수채화, 드로잉 등 총 아홉 개의 작품을 남겼다. 이젤 위에서처럼 고흐의 마음속에서도 과거가 넓게 펼쳐졌다.현실을 불러내는 ‘내 이름은’ 주황향수는 지난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정서적 상태다. 문득 어릴 때 먹던 음식에 식욕이 당기거나, 여름 휴가지를 꼬마 친구들과 물장구쳤던 냇가로 정하거나, 어른들이 불렀던 가락을 흥얼거린다면, 일단 향수에 취한 것이다.
뇌과학에 따르면 과거의 기쁨으로 가득한 순간을 떠올릴 때 도파민이 분비되어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향수는 뇌의 보상 시스템과 관련이 깊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될 때 우리의 뇌는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현재의 도전에 대해 이미 맛본 감각의 강한 끌림이 불안한 현실에 안정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제 고흐가 향수 어린 도개교에 몰입한 이유가 이해된다. 그는 지금 아를에서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향수병을 앓고 있다. 마치 연분홍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고흐의 봄날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고흐는 함께 웃고 함께 울던 친구 에밀 베르나르와 벌인 말싸움에 짜증이 났고, 동생 테오가 다시 아프다는 소식에 심란했으며, 네덜란드 화상 테르스테이흐의 계속되는 퇴짜에 시달렸다.자신의 예민한 위장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당 주인과 다투었고 서점 주인이나 주점 지배인과 실랑이를 벌였으며 물감과 캔버스를 공급하던 상인들과도 언성을 높였다. 심지어 수하물과 운송료 문제로 우체국 직원과 시비가 붙었고 자신을 놀린다는 이유로 꼬마들과도 싸웠다. 아를에서의 낯선 삶이 시작된 지 두 달 만에 터져 나온 고백을 보자.
"미래가 고비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줄곧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자문한다."이 상황에서 고흐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곳은 고향의 풍경들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고향을 떠올리며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골몰할수록 랑글루아 다리의 밧줄과 도르래, 구불구불한 견인용 쇠사슬 따위를 공들여 묘사했다. 연필과 자를 활용해 다리의 메커니즘을 정밀하게 옮기는 측량 기사처럼 열심히 작업했다. 다리는 지평선 위치에 극적으로 축소하여 그렸다.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랑글루아 다리의 대담한 스케치를 베르나르에게 보내면서 설명을 곁들였다.
“도개교의 묘한 실루엣은 마치 연인과 함께 마을로 향하는 뱃사람들과 같아.”고흐는 낯익은 운하 제방을 수도 없이 넘나들며 예리하게 살폈다. 다리를 이루는 커다란 목재들은 강렬한 태양 빛에 본래의 색을 잃었고 말라빠진 뼈처럼 하얗게 보였다. 이런 관찰을 그대로 반영하여 '운하 옆 도로가 있는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1888)를 완성했다. 캔버스를 가로질러 비스듬하게 기다란 줄 모양을 이루는 모래 빛 길을 그렸는데 그 끝에 가로놓인 다리가 엷은 주황이다. 그 위로 장방형 회색 하늘이 있고 아래로 커다란 주황색 교대 두 개가 직각삼각형인 청록색 물결에 어른거렸다. 새까만 쪽배가 방치된 채 강물에 떠 있다. 다리를 건너려는 행인들마저 검은색으로 표현했다.관람자의 시선은 오직 지평선 위의 지붕들과 교대, 그리고 다리로 눈길이 모아진다. 무채색으로 펼쳐진 캔버스에 유독 이것들만 주황이다. 고흐는 이 그림에 금색 테두리를 만들어 헤이그에 있는 화상 테르스테이흐에게 보냈지만 어떤 관심도 얻어내지 못했다.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1888)에서는 캔버스의 절반 이상을 뜬구름 흘러가는 하늘로 배치했고 흐린 보라색 도개교 위에 양산을 든 여인을 놓았다. 두 작품에서 시들어가는 황혼의 주황이나 어두워져 가는 하늘의 보랏빛이 모두 고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이상을 불러내는 ‘내 이름은’ 노랑
고흐는 봄의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상적인 색을 원했다. 베르나르에게 보낸 다리의 스케치에서 당시 고려 중인 색상 구성을 밝혔다.
“나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그 속에 색을 입히고 싶다. 훌륭하고 과감한 디자인을 입히고 싶다.”
이윽고 '빨래하는 여인들이 있는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1888)에서 뼈처럼 볼품없던 다리와 석조 교대는 화창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과감히 노랑으로 바뀌었다. 땅은 황톳빛 주황과 빨강, 그리고 녹색으로 칠해졌다. 좌측 아래 삼각 구도로 놓인 갈대숲은 녹색 위에 주황으로 표현되었고 파문을 이루는 물결은 하늘과 대조를 보이며 짙은 파랑이다.또 다른 세 편의 작품에서 랑글루아 다리는 모두 노랑이다. 현실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선명한 노랑으로 바뀌고 나서야 돌연 생기를 띠었다. 고흐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고흐는 암담한 현실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색을 찾았다. 정서적 원천인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한 결과였다.
이후 그의 독특한 노랑은 더 높은 이상으로 전환되는 이미지를 창조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소용돌이치는 것도, 해바라기와 밀밭에도 넘실대는 것도 노랑이었다. 고흐의 노랑은 과거의 감정과 경험을 현재에 재해석하고 고통을 승화시키는 희망을 담아냈다.일각에서는 고흐의 작품에 노랑이 많은 것을 독주나 도료의 중독, 또는 정신병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고흐의 노랑은 크롬옐로였는데 그 성분에는 독성이 상당히 함유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다리를 노랗게 그린 이유가 중독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다.
필자는 고흐의 노랑을 현실을 극복하려는 향수의 이상향으로 본다. 고흐가 아를로 내려온 것도 이상적 색채를 찾아온 것이었다. 비록 ‘꽃핀 복숭아나무’에서 출세에 대한 핑크빛 꿈을 꾸었지만, 미술계에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고 이제 꽃잎은 지고 한껏 부풀었던 기대도 다 사라졌다.
▶▶▶[관련 칼럼] 출세욕, 식탐, 건강염려증 … 아를 시절의 고흐를 지배한 3가지 감정들
긴 세월 속에서 색 바랜 다리는 늘 무채색이었다. 그런데 고흐는 오히려 노랑이 이름이 되어 나무의 분위기(mode)를 바꾸게 했다. “랑글루아 다리는 하얗다.”가 아니라 “노랑이 랑글루아 다리에 입혔다.” 이름의 자리에 당당히 놓인 노랑은 랑글루아 다리를 현재의 물리적 한계에 머물지 않게 했다. 고흐에게 노랑은 현실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지나쳐 버린 낙원이었다. 과거에 경험한 노랑으로 상징된 좋은 감정이 불안한 미래의 분위기를 전환했다. 이제 미래의 분위기만 노랑이 아닌 미래 자체를 노랑으로 구현할 현실의 실천이 고흐에게 남은 과제였다.향수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던 고흐는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조지훈, 「낙화」에서) 하고 투덜댔으리라. 하지만 연인이 걷던 흑백의 스케치에, 분홍이 지고 흙빛으로 바뀌는 현실적 주황이 아닌, 너랑 나랑 함께할 이상적 노랑을 입혔다. 고흐가 지금 살았다면 아마도 다음의 가사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오늘 너랑 나랑 노랑 (나비같이)
오늘 너랑 나랑 노랑 (훨훨)
나풀 나풀 나풀 날아 (Dance like 봄봄봄)
―매드 클라운, 「너랑나랑노랑」 가사에서
우리의 노랑은 사라진 게 아니다. 아픈 현실에 억압되지 않는 한 우리의 노랑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미 끝났다고 체념한 다리, 하지만 그에게로 넘어갈 다리에 노랑을 얹어 놓자.“내 이름은 노랑!”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