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파격으로 첫 문을 열어젖힌 서울시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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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사랑 앞에 속절없다. 한국 최초의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이자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어 48년 만에 창단한 세 번째 공공 발레단. 모두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는 중압감 앞에서 그 무게를 덜기 위해 서울시발레단이 선택한 건 역시 사랑이었다.
48년만에 창단한 공공 발레단
사랑 주제의 창단 기념작 올려
뜨겁게 사랑하고 이별에 절규
이성은 물론 동성 사랑도 표현
인상적인 미장센과 선곡으로
현대발레 무용단 정체성 과시
사랑이야말로 모두의 빗장을 열고 결계를 풀어낼 가장 강력한 마법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묘약이 아니겠는가. 서울시발레단은 지난 23일부터 사흘간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을 모티브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찾은 관객에게 ‘사랑의 묘약’을 뿌렸다.묘약의 방향은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실험보다는 환상적인 연출로 향했다. ‘한여름 밤의 꿈’은 창단 공연이라는 의미와 컨템퍼러리 발레단이라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의지를 시선을 사로잡는 미장센으로 드러냈다. 1막의 쏟아지는 빗줄기와 거대한 백색 날개, 2막의 사랑과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 나무, 사랑에 대한 회상을 담은 긴 회랑과 계단,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판타지는 환상적인 연출로 어른거린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실재적이다. 뜨겁게 사랑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는 절규하고, 또 이별의 상처를 안고 지난 시간을 회상하기도 한다. 원작에서 사랑의 실타래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불장난을 조장하는 요정 퍽은 익살스러운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함께 숨 쉬는 존재로 탈바꿈했다.
퍽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에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한 안무가의 의도가 읽히기도 한다. 1부에서 요정 퍽의 고뇌는 2부의 붉은 색 옷을 입은 무용수, 상처(broken heart)로 이어진다. 이 둘은 각각 1부와 2부의 장면을 이끌고 연결하는 중심축이 된다.화려한 미장센이 혼미하게 환영 속에 빠져들게 하는 동안 작품의 흐름은 음악이 주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오페라와 달리 멘델스존이 아니라 슈만의 곡을 선택했다. ‘어린이의 정경 Op.15 중 트로이메라이’ ‘판타지아 Op.17’ ‘미르테 Op.25’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곡 외에 성악곡들을 통해 각 장면에 대한 감정선을 끌어낸 점이 독특했다.
‘소프라노와 테너를 위한 4개의 듀엣은 남녀 무용수의 대화가 춤과 음악으로 전해지는 인상을 관객에게 안겨줬다. 슈만의 성악곡은 대부분 사랑의 감정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공연에 궁합이 잘 맞는 음악이기도 했다.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이나 오페라처럼 줄거리를 따라 구성돼 있지는 않다. 장면마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고, 옴니버스에 가까운 파편들이 이어져 사랑이라는 큰 주제 안에 엮어져 있다.수많은 뜨거운 사랑, 외로운 사랑, 삼각관계, 이성과 동성의 사랑, 이 시대의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다루지만 결국 2막의 말미에 등장하는 독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안무가는 욕심껏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이 작품 안에 쓸어 담았다.
컨템퍼러리 발레단이라는 자기정체성은 프롤로그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난다. 영상과 실사로 무대를 이분화해 무용수들의 모습을 담은 첫 장면은 자기소개를 가장 자기답게 전했다. 이 장면에서 던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후 ‘나는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자신을 마주 대하게 한다.
영상 안에 거대하게 잡힌 몸은 꿈틀거리는 욕망의 표현이자 자유의지와 도전의 몸짓이었다. ‘욕망’이라는 단어 안에는 솔직함과 어디로 향할지 자신의 방향성, 그리고 의지가 포함돼 있다.20세기 말, 춤의 작가주의가 태동한 이후 철학과 사상을 무용 작품 안에 담는 것은 새로운 움직임을 담는 것을 넘어설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 됐다. 그리고 최근에는 연출의 힘이 안무를 완성하기도 한다.
‘한여름 밤의 꿈’은 이 모든 것을 담아 화려한 서막의 테이프를 끊었다. 그 서막이 이 ‘동시대의 춤’이라는 이름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어갈까. 사랑만큼이나 서울시발레단이 보여줄 ‘묘약’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기를 기대하게 되는 여름밤이다.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