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일제강점기, 파리로 갔던 조선의 엘리트 화가 6인

[arte] 전유신의 벨 에포크

이종우, 나혜석, 백남순, 임용련, 한락연, 배운성

1920년대 한국 미술가 6인이
파리에 간 이유와 그들의 삶

파리로 유학갈 수 있었던 엘리트였지만,
국가의 혼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이 지난 8월 11일 폐막했다. 이번 올림픽은 1924년 이후 100년 만에 다시 파리에서 개최된 것이다. 2024년의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대한민국 선수단을 북한 국적으로 호명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K팝과 K컬처의 인기가 한국의 인지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이고 있는 2024년의 파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100년 전 파리 올림픽이 열렸던 1920년대에 그곳에 체류했던 한국 미술가들을 새삼 떠올려 보게 했다. 이들은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 합병 이후에 시작된 일제강점기, 즉 한국의 국가적 존재감이 전무하던 시절 파리에 머문 것이다. 이 시기에 한국의 미술가들이 파리에 간 이유는 무엇이고,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20세기 초는 벨 에포크의 정점이었다. 전 세계의 미술가들이 앞다투어 파리로 몰려들었다. 일본과 중국의 미술가들도 몇백 명씩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조선의 미술가들도 국제적인 미술 중심지 파리에 대한 환상을 품었지만, 정작 그곳에 진출한 작가는 6명에 불과했다.

최초의 파리 진출 한국 미술가는 이종우(1899-1981)였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이종우는 1925년부터 파리에서 미술 수업을 받으며 유명 미술 전시회인 살롱 도톤느에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파리에 간 것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1896-1948)이었다. 그는 1927년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고, 파리에서 미술 수업을 받으며 그곳을 거점으로 유럽 곳곳을 여행하다가 1929년에 귀국했다.
이종우, 인형있는 정물, 192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파리 시기에 머물던 샬레의 집 가족들과 나혜석 부부,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나혜석에 이어 여성화가 백남순(1928-1994)이 1928년 파리로 갔는데, 그곳에서 오빠의 친구였던 임용련(1901-?)을 만나 결혼했다. 임용련은 3.1 운동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일본 경찰에 쫓겨 중국 남경에 머물다 1921년 미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시카고 미술대학과 예일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심지어 예일대에서 받은 성적 우수 장학금으로 파리 유학을 떠났을 정도로 임용련은 수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파리에서 부부가 된 백남순과 임용련은 1930년 프랑스 미술가 협회전에 동반 입선하기도 했다.
파리 시기의 임용련과 백남순.
임용련과 같은 해에 중국 용정 출생의 조선족 작가 한락연(1898-1947)도 상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파리에 진출했다. 배운성(1900-1978)은 1922년에 이미 독일에 건너가 베를린 국립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파리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하다 1937년에 프랑스로 갔다. 배운성은 당시 파리의 유명 갤러리인 샤르팡티에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것을 비롯해 유럽에서 5차례나 국제전에 참가했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배운성, 가족도, 1930-35, 대전프랑스문화원 소장.
20세기 초 벨 에포크 시기의 파리에 머물던 한국 작가들 중 임용련과 한락연은 항일 운동에 가담한 이력이 있었다. 나혜석은 3.1 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으나 이후 친일 인사로 변절한 최린을 파리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와의 스캔들로 귀국 후 이혼하면서 이후 굴곡진 인생을 살게 된다. 당대의 파리는 일제 강점기였음에도 파리에 갈 수 있었던 조선의 엘리트 작가들, 3.1 운동에 가담했던 미술가들, 그리고 변절한 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함께했던 장소였다.
임용련, 에르블레 풍경, 193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20년대에 파리에 진출했던 한국 작가들은 귀국 후에도 크게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종우가 1928년 귀국해 프랑스 진출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소설가 이광수는 그를 당나라에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에 비유하며 미술의 서울 파리에 진출한 작가로 극찬했다. 몰려드는 관람객들로 전시 기간을 연장할 정도로 그의 귀국전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다음 해에 귀국한 나혜석도 수원에서 귀국전을 열었고, 임용련과 백남순도 1930년 돌아와 한국 최초의 부부 공동 전시회를 개최했다. 배운성은 1940년에 귀국해 양화연구소를 개설하고 홍익대 미술과 초대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파리에 진출을 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부유한 엘리트였지만, 귀국 이후 이들의 인생사가 평탄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이 작가들 대부분은 한국 전쟁을 전후로 사망했거나, 월북 또는 납북되었다. 한락연은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1948년 사망했다. 귀국한 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미술과 영어를 가르쳤고 이후 서울세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임용련은 한국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부인인 백남순도 이 사건의 충격으로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배운성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월북했다. 1950년대 초에 홍익대 교수로 재직했던 이종우 정도가 유일하게 귀국 후 정상적인 미술계 활동을 했을 정도였다.

6명의 작가들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극소수의 엘리트였지만,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그와 같은 경험을 제대로 활용해보지도 못한 채 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20세기 초 파리에 체류했던 한국 미술가들의 굴곡진 인생사는 부유한 엘리트일지라도 국가의 지난한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