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아모리쇼, 현대미술의 심장으로 다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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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한빛의 아메리칸 아트 살롱세계 경제의 심장 뉴욕, 그곳을 대표하는 아트페어를 꼽으라면 단연 ‘아모리쇼’(Armory Show)입니다. 뉴욕엔 일 년에 백여 개 가까운 아트페어가 열립니다. 그런데도 뉴욕 아트페어 하면 다들 ‘아모리쇼’를 이야기하죠. 그도 그럴 것이 1913년 첫 아모리쇼에 등장한 인물이 ‘마르셸 뒤샹’입니다. 피카소와 마티스, 칸딘스키, 브랑쿠지도 이때 쇼에서 소개됐습니다. 현대미술의 역사죠. 한마디로 ‘뉴요커들의 자존심’인 셈입니다.
뉴요커들의 자존심, 아모리쇼 2024 미리보기
1913년과 1994년, 두 개의 아모리쇼올해는 제30번째 아모리쇼가 9월 5일부터 8일까지 뉴욕 자비츠 센터에서 열립니다. 서울이 프리즈로 한창 바쁠 기간, 뉴욕도 마찬가지죠. 앞서 말한 것처럼 아모리쇼가 처음 시작한 것은 1913년인데, 올해가 겨우 30회입니다. 사실 두 행사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릅니다. 현재의 아모리쇼는 1994년부터 아트페어의 형태로 시작했습니다. 1913년의 아모리쇼는 현대미술 기획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아모리쇼는 자신들이 ‘역사적인 1913년 전시회의 혁신적 정신을 기리면서, 동시에 현대 미술의 최신 동향을 선보이는 중요한 플랫폼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아모리쇼는 뉴욕 맨해튼의 제69연대 무기 창고(armory)에서 국제 현대미술전(International Exhibition of Modern Art)이라는 이름으로 열렸습니다. ‘아모리쇼’는 장소에서 기인한 별명입니다. 당시 행사는 미국 화가 및 조각가협회(Association of American Painters and Sculptors)가 주최했고 이때의 목표는 “대중의 예술 취향을 선도하고, 진보적인 화가(미국 및 외국)의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실험적인 작품을 제대로 선보이고 싶었던 것이죠.이 행사엔 약 1300여점의 작품이 나왔고, 이때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작품이 바로 마르셸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번’입니다. (지난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뒤샹 회고전에서도 선보였습니다. 현재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입니다.) 한 나체의 여성이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을 장노출한 연속사진처럼 그려냈는데, 정지한 이미지나 클라이맥스의 한 장면을 그렸던 기존 방식과 전혀 다른 시도였습니다.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던 뒤샹이 자기 나름대로 연속적인 동작의 움직임과 아름다움을, 곧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죠. 그러나 너무 파격적인 시도였을까요. 뉴욕 메일 앤 익스프레스 기자이자 작가였던 줄리안 스트리트(Julian Street)는 그 작품을 보고 “기와 공장이 폭발한 것 같다”(“to look like the explosion of a shingle factory”)고 감상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 작품은 1912년 파리에서 열린 살롱 데 장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에 출품 예정이었는데 ‘입체파 같지 않고 너무 미래파 같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던 스토리가 있지요. 입체파에서 진화를 시도했던 뒤샹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겠죠.그외에도 앙리 마티스의 ‘푸른 누드’(볼티모어 미술관 소장), 파블로 피카소의 ‘겨자 단지를 든 여인’(헤이그 미술관 소장), 바실리 칸딘스키의 ‘즉흥 27번 (사랑의 정원 II)’(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폴 고갱의 ‘악마의 말’(내셔널갤러리 소장), 빈센트 반 고흐의 ‘생 레미의 산’(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등도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작품들입니다.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보면 아모리쇼의 초기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작가들이 유럽 현대미술 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더불어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미국 고유의 추상 운동이 전개될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으니까요. 게다가 미술관들이 동시대 미술을 수집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논란을 남기고 사라진 아모리쇼는 1999년 부활하는데, 1994년부터 시작한 그래머시 국제 아트 페어(Gramercy International Art Fair)가 이름을 변경한 것입니다. 콜린 드 랜드(Colin de Land), 팻 헌(Pat Hearn), 리사 스펠만(Lisa Spellman), 매튜 마크스(Matthew Marks), 폴 모리스(Paul Morris) 등 다섯 명의 뉴욕 기반의 아트딜러들이 신진 갤러리들에게 새로운 플랫폼을 제공하고자 시작했습니다. 페어는 호텔 아트페어(뉴욕 그래머스 파크 호텔)로 열렸고, 이후 LA(샤토 마르몽)와 마이애미(더 랄리 호텔)에서도 개최했습니다. 싹이 보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플랫폼이라는 평가받으며 성장 일로를 달리던 그래머시 국제 아트페어는 1999년 행사를 뉴욕 69연대 무기 창고에서 열면서 이름을 바꿉니다. ‘아모리쇼’로요.
아모리쇼의 유산을 따른다는 이미지를 주며 브랜딩에 성공한 것이죠. 이후부터는 매년 미국 미술시장의 바로미터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아모리쇼에 참가하는 해외 갤러리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경쟁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기도 하고요. 올해는 한국에서도 4개 갤러리(우손 갤러리, 갤러리 바톤, 조현 갤러리, 지 갤러리)가 참여합니다.프리즈 인수 후 아모리쇼
특기할 점은 아모리쇼가 지난해 7월 프리즈에 인수됐다는 것입니다. 프리즈는 거의 같은 기간에 프리즈 서울(9월 4~7일)과 아모리쇼(9월 5~8일)를 개최합니다. 올해는 그나마 하루 차이가 나는데, 작년엔 아예 일정이 같았습니다. 시장에서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우려하는 쪽은 ‘프리즈 뉴욕(5월)도 있는데 아모리쇼까지 과연 일 년에 두 번이나 열리는 프리즈 행사가 제대로 진행될까’, ‘아무리 시장이 좋다고 해도 아시아와 뉴욕까지 큰 행사를 진행하는 건 쉽지 않다. 프리즈도 결국 사기업이라 매출에 신경 쓸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쪽은 ‘아시아와 뉴욕은 다르다. 결이 다른 행사라 상관없다’, ‘부동산 회사보다 아트페어 전문 회사가 낫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한국에선 ‘프리즈 서울 5월 설(說)’이 돌았습니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최고경영자(CEO)가 인수 직후 아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날짜가 겹치는 것은 이상적이진 않다(not ideal)”고 코멘트했기 때문입니다. ‘둘 중 하나의 날짜를 옮기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지만, 날짜 변경에 대한 소문이 돌기엔 충분했던 것이죠.
올해는 인수 후 프리즈가 아모리쇼를 운영하기 시작한 사실상 첫해입니다. 글로벌 브랜드 아트페어인 프리즈가 아모리쇼의 뉴요커 바이브를 얼마나 잘 지켜나갈 것인가가 관전 포인트입니다. 아무래도 프리즈 뉴욕은 ‘세련되고 국제적’, 아모리쇼는 ‘커뮤니티 중심적’(더 키친, US오픈과 협력 등)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의식한 것일까요? 올해 아모리쇼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US오픈에 조각품 설치 콜라보레이션을 지속하고, 비영리 아방가르드 예술단체인 더 키친의 수석 큐레이터인 로빈 파렐에게 큐레이팅 섹션인 ‘포커스’를 맡겼습니다. 뉴욕 퀴어 풍경을 기록한 지미 라이트(Jimmy Wright)의 드로잉, 퍼포먼스 작가인 올리버 헤링(Oliver Herring)의 90년대 작품, 자메이카 출신 설치작가인 에보니 G. 패터슨(Ebony G. Patterson)의 정원 풍경을 통해 후기식민성을 탐구하는 작품 등 아방가르드하고 급진적인 작품을 선보일 예정입니다.30주년을 기념한 행사도 있습니다. 아모리쇼 아카이브로 지난 30년을 돌아보고, 데이비드 살레(David Salle)의 회화가 타임스퀘어 전광판에서 선보입니다. 1994년 그래머시 호텔에서 페어를 재현한 부스도 설치될 예정이고, 대담 프로그램은 ‘아모리 라이브’라는 이름으로 이어갑니다. 올해는 100여명의 큐레이터가 참여한다고 합니다.
전 세계 30개국에서 235개 갤러리가 참여하는데, 눈에 띄는 작가는 영상작업으로 유명한 아이작 줄리앙(Isaac Julien,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추상과 재현, 자연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회화작가 유키마사 이다(Yukimasa Ida, 마리아 이브라임 갤러리), 한국계 미국 작가인 수잔 송(Susan Song, 갤러리 바톤) 등이 꼽힙니다. 리처드 롱(Richard Long), 에밀리 루카스(Emil Lukas), 부르스 뉴먼(Bruce Nauman)과 같은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도 리스트에 올라와 있습니다.
‘뉴요커의 아트페어’라고 내 걸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아모리쇼가 올해는 어떤 성과를 이뤄낼지 궁금합니다. 유럽 고객과 딜러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분석되는 만큼 아모리쇼에 참가하는 갤러리들의 전략도 ‘한 작가만 띄우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프로모션에 방점을 찍는 것이죠. 크리스텔 차데(Kristell Chadé) 프리즈 박람회 총괄 디렉터는 “지난 30년 동안 아모리 쇼는 뉴욕의 문화 지형에 닻을 내리는 역할을 해왔다. 최전선에서 뉴욕 관객과 갤러리가 소통할 기회를 제공했다”며 “발견을 위한 플랫폼(position as a platform for discovery)을 공고히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최근 시장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한국 갤러리와 한국 작가들에 대한 평가도 변화가 있을지 기대됩니다.이한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