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마리가 뒤엉킨 뱀 그림에는 한 여성의 ‘슬픈 전설’이 있다

[arte] 유창선의 오십부터 예술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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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슬픈 전설'을 가졌다 여긴 화가
작품으로 보는 인간 '천경자'의 삶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는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두 건의 전시가 8월 상순부터 열리고 있다. 10년 만에 새롭게 기획한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에서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 특히 해외 여행을 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많이 전시됐다. 함께 열리고 있는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기를 거쳐 민주화에 이르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천경자를 포함한 여성 작가 23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천경자 화백(1975년) / 사진. ⓒ문선호

3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35마리의 뱀들이 뒤엉켜 있는 그림이 눈에 띈다. 이 징그럽고 기괴한 그림이 천경자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 <생태>(1951)다. 천경자는 아름다운 많은 소재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뱀들을 그렸을까. “그 속에서 나는 밤마다 뱀을 어떻게 화면에다 깔아 구도를 잡을 것인가, 눈을 감은 채 구상했다. 그 판국에 어찌 찔레꽃 향기를 찾는, 시설이 깃든 배 따위를 그리겠는가? 차라리 뱀 수십 마리를 화면에 집어넣음으로써 슬픔을 극복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천경자가 말한 ‘그 판국’은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의미한다. 사랑했던 동생 옥희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자와의 사랑은 고통만을 남겨주었다. 생계를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천경자는 그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생태>를 그렸다. 마치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뱀과 같이 독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각오라도 하듯이.
천경자 &lt;생태&gt;(1951) / 이미지출처.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는 스스로 ‘슬픈 전설’을 가졌다고 여긴 화가였다.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천경자는 그림 뿐만 아니라 18권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의 제목이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하는 식이다. ‘슬픈 전설’을 가진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그림은 전시실에서도 볼 수 있다. 허공을 보고 있는 듯한 눈에서는 슬픈 한이 전해지고, 머리를 둘러싸고 있는 네 마리의 뱀은 22세 때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다. 하지만 저 멀리를 내다보는 듯한 눈에서는 지금의 현실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읽혀진다.
천경자 &lt;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gt;(1977) / 이미지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슬픔은 천경자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정서이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화병이 된 마돈나>(1990)는 팝 스타 마돈나를 그린 작품이지만 사실은 작가 자신의 슬픈 한이 담겨있다. 그림 속의 마돈나는 화려한 꽃들에 둘러싸여 있고 매혹적인 표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정작 눈에는 우수가 가득 차 있다. 유명 스타이지만 고독하고 슬픈 눈빛을 드러낸 이 그림은 사실은 천경자 자신의 슬픔을 마돈나에게 대입한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환경 속에서도 슬플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한을 천경자는 그린 것이다.
천경자 &lt;화병이 된 마돈나&gt;(1990) / 이미지출처. 서울시립미술관
많이 알려진 <폭풍의 언덕>(1981)에서도 천경자는 자신의 슬픔, 불행, 고독 같은 감정을 작품의 소재로 연결시켰다. 에밀리 브론테가 쓴 소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는 학대와 힘든 노동으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성격도 폭력적이고 사납게 변해버린다. 그래서 히스클리프의 거칠은 격정과 증오를 통해 모순과 혼돈이 뒤섞인 인간 본성을 다룬 작품이다. 천경자는 이런 히스클리프가 자신과 가족 중 누군가의 분신일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그의 불행과 고독, 사랑의 향수에 자신을 대입시켰다.

그림에는 말라버린 검붉은 관목 히스와 누런 갈대밭이 거센 바람에 몰아치고 있다. 회색빛 하늘과 맞닿은 황량한 황무지, 바람에 휘감기듯 흔들리는 갈대가 눈에 들어온다. “에밀리 브론테는 폐결핵으로 일찍 죽었지만 빵 굽는 솜씨가 좋았다는데 우리 여동생 옥희가 살았더라면 한국의 브론테 같은 여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으로 자위를 해 보았다.” 천경자의 <폭풍의 언덕>에는 자신과 가족들의 삶이 담겨 있다.
천경자 &lt;폭풍의 언덕&gt;(1981) /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천경자는 2~3년에 한번씩 해외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그곳에서 자신의 감흥과 꿈을 담은 그림들을 그렸다. 30년동안 그가 그림 기행을 다닌 곳이 20여개국에 이른다. 이번에 전시된 <초원 I>은 아프리카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초원 속 코끼리의 등 위에 나체로 누워있는 여인에게서는 슬픈 한을 간직한 상념이 전해진다. 자연과 많은 동물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건만, 코끼리 등 위에 엎드린 작가는 어찌할 수 없는 고독에 갇혀있다. 천경자는 이 작품에 대해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미래의 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이에요. 그 속엔 내 슬픈 생애의 다면(多面)이 숨쉬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천경자 &lt;초원&gt;(1973) / 이미지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는 색이 좋아 그림을 시작했던 화가였다. 그녀는 채색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담은 그림을 그리곤 했다. 자기 작품을 특정한 틀에 가두지 않고 채색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런데 8.15 해방이 되고 나자 일본에서 유행했던 채색화를 무조건 일본화로 규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채색화는 홀대받아 대부분의 작가들이 수묵화를 그리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천경자는 채색화를 버리지 않고 묵묵히 그에 정진했다. 천경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해방이 되자 내가 좋아하는 색채를 다룬다고 해서, 일본화가 무엇인지 한국화(동양화)가 무엇인지 분별조차 못하던 당시 일부 동양 화단에서는 때마침 정치적으로 민족반역자로 친일파를 몰아치던 시류에 맞춰 내 작품도 무조건 일본화라고 몰아, 싹트기 시작한 내 예술 사상을 구둣발로 무참히 문질러 댔다. 그것을 보고 놀란 약삭빠른 색채 화가들은 모조리 수묵화의 대열에 끼었지만 나는 계속 좋아하는 색채화를 그렸다… 얼마쯤 지나니까 일본화라는 말이 들어가더니 이제는 내 작품을 서양화라고 했다. 도무지 귀찮은 일이었다.”“살아가는 데 있어 무척 조심을 한다 해도 명암이 기울었다 폈다 하는 운명의 장난으로 그날의 일진이 어두운 쪽으로 기울면 어디에선가 엉뚱한 오해와 모함이 꾸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유자적하던 옛날처럼 초연한 자세로만 살 수 없는 현대일수록 늘 새로운 날벼락, 25시에 대비해서 살아가야 되니 인생은 피곤하다. 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자기를 아끼고 초연히 살고자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살이다.” 이것이 어디 천경자만의 얘기일까. 그저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아끼며 조용히 살고자 해도 험난한 세상살이는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것일 게다.

유창선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