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비빔밥' 같은 영화, 뻔한 맛인데 손 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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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노웨이아웃 : 더 룰렛' 리뷰디즈니플러스의 신작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의 생명력은 놀랍게도 ‘상투성’이다. 이전의 온갖 작품들에서 모티프와 이야기 구조, 캐릭터를 가져왔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모방의 상투성이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 이수진의 영리한 짜깁기, 마치 이야기라는 기계에 있어 신형 이음새 부품을 새로 만들어낸 듯한 발명품 같은 느낌을 준다.진부하지만 새롭다. ‘이건 결국 선이 이길 것이야, 아 참 선 따위는 없지, 그래도 나름대로 악을 응징해 나갈 거야. 아냐. 그냥 주인공이 살아남고, 가족이 안전해지며 게다가 주인공에게 돈도 생기게 될 거야’ 등등, 그런 안심의 마음을 준다. 그것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동력이다.기본적으로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의 속내는 미국의 잔혹 공포극 ‘더 쏘우’에서 가져왔다. 여기에 ‘오징어 게임’을 얹혔지만 이건 순전히 극 중 ‘가면남’이 쓴 마스크의 이미지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보다는 ‘더 에이트 쇼’에 더 가깝다.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보면 할리우드의 수많은 자경단(自警團) 영화, 예컨대 찰스 브론슨의 ‘데드 위시’ 같은 시리즈의 콘셉트를 본뜨고 있다. 사법당국에 기대지 않고 직접 범죄자를 처단하는 이야기들이다.
범죄현장서 돈 빼돌린 형사
'반성한 척 연기' 연쇄강간범
돈에 양심 팔아먹은 변호사
대국민 살인청부한 '가면남'
善 따윈 없다, 악인끼리 전쟁
'오징어게임''데드 위시' 떠올라
익숙한 캐릭터들 모아뒀더니
되레 예측불가, 추리하는 재미
초반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안성기-박중훈 추격전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큼 드라마 전편에 각종 영화나 드라마의 레퍼런스가 넘쳐난다. 심지어 ‘노 웨이 아웃’이란 제목은 1986년 로저 도널드슨이 만든 케빈 코스트너, 숀 영 주연의 영화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두 남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오프닝. 한 남자(현봉식)가 고기 써는 막칼로 또 한 남자 윤창재(이광수)의 귀를 자르려 한다. 친구 사이인 듯한 남자는 자꾸 “창재야 미안하다, 금방 끝난다”고 말하며 한쪽 귀를 잘라 낸다. 한편 이런저런 사기 사업에 돈을 탕진한 주인공 형사 백중식(조진웅)은 인생이 막장이다. 당장 이자 500만원을 갚지 못하면 딸의 첼로를 팔아야 할 판이다.백중식은 병원에서 사라진 귀 잘린 남자의 뒤를 쫓다가 귀를 자른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고 비좁은 골목길을 헉헉대며 추격하지만 남자는 계단을 구르다 죽는다. 문제는 그 바로 직전 백중식이 남자의 집에서 10억원이 든 가방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백중식은 돈이 급하다. 아이의 첼로는 지켜야 한다. 그는 10억원을 가로채기로 한다.
8부작 드라마의 모든 복잡한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형사가 돈을 ‘꿀꺽’하는 것, 부패 형사가 된 주인공의 사정이 이 영화의 모든 모티프를 제공한다. 주인공 형사가 돈 10억원을 보고 동공이 흔들리는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한다.돈 10억원은 게임의 상금 같은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가면남이 나타나 룰렛 게임을 한다. 법과 사법당국이 단죄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과 별도의 형벌, 그리고 그걸 집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금 등을 룰렛 판을 돌려 결정한다. 얼마 전 스토커 짓으로 한 여자를 자살까지 몰아가게 한 윤창재라는 이름이 타깃이 되고 그의 귀를 자르면 상금 10억원을 준다는 것이 룰렛에서 결정된다. 앞의 모든 상황, 두 남자의 활극과 주인공 형사가 10억원 가방을 가로챈 것은 모두 거기에서 비롯됐다. 이 룰렛 게임은 삽시간에 ‘돈의 맛’을 전염병처럼 퍼뜨린다. 가면남은 새로운 목표를 정한다. 연쇄 강간범으로 고작 13년을 살다가 형집행정지로 나오게 되는 김국호(유재명)의 목에 200억원을 건다. 전국이 난리가 난다.
현상금을 걸고 범죄자를 처단하는 이야기로만 이어 갔으면 드라마는 8부작을 채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여러 캐릭터를 같이 비벼 넣음으로써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재주를 부린다. 그런 재주는, 결국 우리 사회의 인간 모두가 상하를 막론하고 돈에 미쳐 있으며 도덕이나 사회적 정의와는 멀어도 한참 먼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게 만든다. 상업성의 탈을 쓴 이 드라마는 그 안에 사회적 메타포를 폭탄처럼 심어 놓고 있다. 선의의 이율배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편으로는 삼중 사중의 빌런 드라마다. 좋은 놈은 없다. 아주 나쁜 놈과 그저 나쁜 놈만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원초 빌런인 연쇄 강간범 김국호와 자신의 귀 잘린 돈 10억원을 찾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200억원까지 욕심을 내는 윤창재 캐릭터, 그 ‘이중 케이크’ 구조가 잘 짜여 있다. 두 악당이자 악마 모두 주인공인 백중식을 더 이상 도망갈 데 없는 구석으로 몰아간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