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무티와 빈 필의 완전무결한 '브루크너 교향곡 8번' [여기는 잘츠부르크]

[이진섭의 음(音)미하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4)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에 만나는 밀도 높은 소리 풍경
느린 걸음으로 거대한 숲 속을 누비듯 연주해
빈 필을 숭고한 경지로 끌어올린 리카르도 무티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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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 공연 후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리카르도 무티와 빈 필 / 사진. © 이진섭
원형을 간직한 연주, 빈 필이 초연한 브루크너 교향곡 8번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는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음악가였다. 오랜 기간 교사로 생활하다가, 린츠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두각을 나타내고,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작곡가의 길에 들어섰다. 평소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숭상했는데, 이런 이유로 당시 빈에서 음악적 기득권이었던 브람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브루크너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실제 그에게 한 번도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7번이 라이프치히(1884)와 뮌헨(1885)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후 노년에 이르러서야 상당한 영예를 거머쥔다.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브루크너가 말년에 쓴 교향곡의 최정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는 교향곡 8번을 1887년에 작곡한 후, 주변의 삐딱한 평판이 신경 쓰여 88년, 90년, 92년에 세 번의 개정을 거친 후, 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어렵게 세상에 나온 교향곡을 1892년 12월 18일 지휘자 한스 리히터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초연했다. 이유 불문하고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원형을 간직한 빈 필의 연주로 듣고 싶었다.
[차례대로] 리카르도 무티와 빈 필 공연 당일의 대축제극장 외부, 내부 / 사진. © 이진섭
리카르도 무티, 빈 필과 함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으로 부르크너 탄생 200주년 기념해이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빈 필은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와 함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연주하는 것으로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을 기념했다. 대체적으로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레고블록 같은 악기의 소리를 거대한 성처럼 쌓아가는 게 특징이다. 만약 빈 필의 견고하고 풍성한 소리와 리카르도 무티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가 만난다면, 어떤 음악이 탄생할지 공연 전부터 기대가 컸다.
리카르도 무티의 포디움과 &lt;브루크너 교향곡 8번&gt; 악보 / 사진. © 이진섭
느린 걸음으로 거대한 숲속을 누비듯 연주해

더블 버튼의 검은 슈트를 입은 리카르도 무티가 대축제극장 포디움에 섰다. 큰 몸짓으로 리카르도 무티는 1악장' Allegro moderato'의 탐험을 시작했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올곧은 자세와 풍채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1악장 도입부에서 현악기와 관악기가 부끄럼을 타듯이 조심스레 소리의 문을 열었다. 브루크너의 명 해석가로 알려진 지휘자 귄터 반트(Günter Wand)가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NDR Elbphilharmonie Orchester)과 2000년도에 연주했던 버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리카르도 무티는 그보다 느린 걸음으로 음표의 숲을 헤쳐 나간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긴장감이 좀 더 오래 지속되고, 1 주제부가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숨이 멎을 것 같았던 시간은 현악기의 트레몰로와 금관악기의 외침으로 완전히 해제됐다. 오랜 기간 베르디와 모차르트 오페라로 독보적인 스케일과 스타일의 세계를 완성해낸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전개였다. 침묵으로 수렴하는 1악장이 끝나고 관객들은 기침으로 막힌 숨을 달랬다.

이어진 제2악장 'Scherzo: Allegro moderato'에서 무티와 빈 필은 점진적이고 밀도 높은 소리들을 축조했다. 팀파니 연주자가 붉은 스틱을 휘날리며 춤추듯 박자를 쳐대고, 호른과 바이올린이 화답해 음악이 쌓이면서 브루크너 특유의 확장적 ‘소리 풍경’이 대축제극장에 펼쳐졌다.

제3악장 'Adagio'에서 현악기와 관악기들이 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하프, 심벌즈, 팀파니, 트라이앵글까지 가세하면서 제2악장의 풍경은 소리 성전으로 완성된다. 오감을 압도하는 초월적 소리들이 동경과 두려움으로 변모해 공연장 어딘가에 떠다닌다. 에드먼드 바크가 말했던 ‘공포적 숭고함’이 4악장에서 ‘벅찬 숭고함’으로 변조된다. 침전하면서 돌진하는 공포의 기운을 희망찬 소리들이 치유하면서 교향곡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공연 후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리카르도 무티와 빈 필 / 사진. © 이진섭
아름다운 엄격함, 리카르도 무티의 마법

리카르도 무티는 까마득한 밤에 흘러내리는 은하수처럼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완성시켰다. 빈 필의 모든 연주자들은 그의 아름다운 엄격함 앞에서 마법 같은 앙상블을 만들어냈고, 모든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공연이 끝나고, 생경한 소리의 기운이 가시질 않아 대축제극장의 스태프가 나가야 한다고 나에게 말을 건네기 전까지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여운을 즐겼다.
2024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 리카르도 무티와 빈 필 공연 입장권 / 사진. © 이진섭
[참고 영상: 지휘자 귄터 반트와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브루크너 교향곡 8번> (채널. NDR Klassik)]


이진섭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