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맥박이 멈췄다…연구소 폐쇄·중고 세포배양기 매물 쏟아져

팔고 줄이고…돈줄 막힌 중소 신약개발사 '동면상태'

'공유 연구실'서 간신히 연구
돈 많이 드는 후속임상 포기
인력 감축해 대표 1인만 남기도
CRO·특허 등 연관산업도 타격

바이오 '기업사냥꾼' 활개
"투자 받아줄께" 경영컨설팅 둔갑
불공정 계약으로 경영권 뺏기기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국에서도 탐낸 희귀병 치료제 후보물질을 개발한 A사는 최근 임상 1상에 성공하고도 2상을 포기했다. 벤처캐피털(VC)들이 후속 투자를 주저해 운영자금이 바닥나는 바람에 연구인력을 대거 내보냈기 때문이다.

바이오업계의 자금난이 장기화하면서 신약후보물질(파이프라인) 구조조정, 유휴 장비 매각, 인력 감축에 나서는 것은 물론 연구소를 폐쇄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신약개발산업의 ‘공동화(空洞化)’ 우려까지 나올 정도다.

“팔 건 다 팔고 직원도 내보내”

1일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에 따르면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다국가 임상은 2020년 15건에서 2023년 31건으로 두 배로 증가했다. 글로벌 임상시험에 나서는 유망 신약 후보물질이 그만큼 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임상 건수 증가는 바이오기업에 비용 부담 요인이 되고 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신약개발이 잘될수록 더 많은 임상 비용이 들기 때문에 회사는 역설적으로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했다.

상장 바이오·헬스케어 기업의 1분기 연구개발비는 전년 동기 대비 3.6% 줄었고 연구개발 인력도 감소세로 전환했다. 일부 바이오기업은 자체 연구시설을 없애고 여러 기업과 돈을 모아 ‘공유 연구실’을 마련해 연구 기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국내 바이오산업의 자금 혹한기가 1~2년 더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한 회계법인 대표는 “우량 기업들도 장기전에 대비해 미리 ‘실탄 구하기’에 나서면서 어려워진 바이오회사들은 대부분 경영권을 내놓은 상태”라고 전했다.

바이오 연관 산업도 직격탄

신약개발이 타격을 받자 임상시험수탁기관(CRO), 특허법인 등 연관 산업도 불황의 늪에 빠졌다. 국내 주요 상장 CRO 6곳 가운데 4곳의 올해 상반기 매출이 뒷걸음질쳤고 6곳 중 5곳은 영업이익이 줄거나 적자전환했다.

기업이 신약후보물질을 개발하면 동물실험(전임상)과 환자 대상 안전성 및 유효성 검증(임상)을 하는데, 이를 대행해주는 곳이 CRO다. 한 CRO 관계자는 “임상 1상을 통과한 바이오기업 중 돈이 없어 2상과 3상 비용을 지급하지 못한 업체가 많다”고 했다. 특허법인들도 일부 바이오회사가 신약개발에 따른 특허 출원과 등록 수수료 지급을 중단하자 자체 비용으로 충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투자 유치 보장” 기업사냥꾼 활개

일부 바이오 기업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투자 유치를 위해 경영컨설팅으로 둔갑한 ‘기업사냥꾼’ 세력과 접촉하고 있다. 한 벤처캐피털 대표는 “전과 이력이 있는 전주(錢主)는 뒤에 숨은 채 훌륭한 스펙을 가진 인재를 앞세워 영업을 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이 입수한 한 바이오기업의 컨설팅계약서에 따르면 기업사냥꾼 B사는 홍보비, 번역비, 출장비 등 비용 지급과 관련해 월 100만원 한도의 법인카드를 요구했다. 해외출장 시엔 일당 50만원과 별도의 비용을 요구했다. 한 벤처캐피털 대표는 “법인카드 발급 요구는 불법 소지가 큰 사안”이라며 “모 기업사냥꾼이 10개 바이오기업에서 한꺼번에 법인카드를 발급받아 쓴 사례도 봤다”고 말했다.

B사는 계약서에 착수금 1000만원과 월보수 700만원도 명시했다.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투자유치가 성사된 경우 성공보수로 투자유치 금액의 5%를 3영업일 내 입금할 것도 요구했다. 인수합병(M&A) 시에도 5~10% 수준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업계 관계자는 “월보수와 성공보수를 동시에 요구하면서 업계 통상 수준의 2~3배로 정한 계약서는 처음 본다”며 “이런 ‘불공정 계약서’로는 회사가 금세 껍데기만 남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