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쩍 늘어난 '유령 범인'…사법방해죄 도입 고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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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3
조재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피의자와 참고인들이 공모해 거짓 진술을 하고 허위 자료를 제출하면 수사기관은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는 형사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국가의 정의 실현 기능을 마비시키고 결국 개인의 자력 구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은 ‘사법방해죄’를 도입하고 있다.한국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증거인멸죄, 범인도피죄, 무고죄, 위증죄 등으로 일부 사법방해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 체계로는 공범들의 조직적인 증거 인멸이나 조작에 대응하기 어렵다. 특히 현 제도하에선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 능력이 사라진다. 이런 제도는 공범들의 진술 번복을 조장할 수 있다.
많은 국민은 피의자나 참고인들이 허위 진술을 하고 허위 증거를 제출하더라도 수사기관이 실체적 진실을 잘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거짓말 속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해 수사기관이 미처 살피지 못하는 부분까지 검토해 자신들의 피해를 회복할 수 있지만, 돈 없고 힘 없는 서민은 상대방이 합심해 거짓 증거를 제출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구조다.
미국에선 연방대법원이 1998년 ‘브로건 대 미 정부’ 판결을 통해 피의자의 단순 부인 진술도 허위진술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는 수사 과정에서의 고의적인 거짓말이 실체적 진실 규명을 저해한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한국도 이제 체계적인 사법방해죄 도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최근 300억원을 챙긴 주가 조작 세력이 만들어낸 주범이 가공인물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데 2년이나 소요된 사실은 현 제도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고 다른 중요 사건의 수사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법방해죄 도입은 단순히 처벌 강화가 아닌, 우리 사회의 정의 실현 능력을 제고하는 방안이다. 이는 곧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진실한 진술이 이뤄지고, 이를 바탕으로 공정한 판단이 내려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사법방해죄 도입을 위한 제도적 정비에 협력해야 한다. 이를 통해 건강한 사법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