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만 아는 명작, 발렌틴 세로프의 초상화는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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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서정의 어쩌면 나만 아는 명작들<복숭아를 든 소녀>(1887)방에 스며드는 햇빛이 빚어낸 다채로운 음영이 이토록 화사하고 보드랍다. 파스텔 색상이 전해주는 매혹적인 따뜻함이 빛난다. 이는 19세기 말 러시아 시각 예술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표현법이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싱그러운 숨결이었다. 발렌틴 세로프(1865-1911)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원했던 것은 신선함, 자연에서는 항상 느끼지만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신선함이었다. 나는 한 달 넘게 그림을 그렸고 불쌍한 소녀를 죽을 때까지 고문한 셈이었다. 나는 정말 그림의 싱그러움을 완전한 완성도로 보존하고 싶었다. 마치 옛 거장들처럼.”빛은 벽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와 식탁보 위에 떨어지는가 하면 소녀의 분홍 드레스 소매와 어깨를 타고 그을린 뺨에도 감긴다. 달콤한 복숭아 향이 방안에 차오른다. 소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어린아이 같은 초조함이 있고, 배시시 흘러나오는 미소를 의젓하게 참으려는 인내심이 보인다. 식탁에는 정원에서 막 따온 듯 이파리까지 딸려온 복숭아가 서넛 있지만 아이의 손에는 확실한 자기 것 한 개가 이미 들려있지 않은가. 바람 속을 달리다 막 식탁 앞에 앉은 듯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 불그스름한 뺨, 웃음을 머금은 눈빛, 이 모두가 생동감을 준다.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의 세로프 실에는 수많은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이 소녀의 초상화가 가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영원한 젊음으로서 그렇게.
발렌틴 세로프의 와
이 그림의 놀라운 점은 초상이지만 정물이고, 정물이지만 풍경이라는 것. 즉, 녹음 짙은 창밖 풍경과 신중하게 배치된 실내의 사물, 그리고 정서를 표현하는 인물이 서로를 침투하면서 여유롭게 조화를 이룬다. 복숭아는 반짝이는 광택과 부드러운 빛의 흡수가 절묘하고 아이의 보드라운 피부와 듀엣을 이루듯 벨벳 느낌의 질감을 재현했다. 이 그림은 스물두 살 화가의 데뷔작인 동시에 순식간에 그를 도달할 수 없는 높이로 끌어올린 초상화였다. 그는 모스크바 미술 애호가 협회상을 받았다.
세로프의 작품은 러시아에서 19세기 예술의 문을 닫고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20세기 예술로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그 시기 러시아 미술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다른 경향으로 옮겨가는 속도가 무척 빨랐는데 세로프는 특유의 호기심과 완벽주의적 작업 성향으로 이동파적 경향과 인상주의로부터 출발해 상징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을 유영하며 작업했다. 그는 이름난 작곡가 알렉산드르 세로프와 세기의 진보적인 여성으로 민주주의 사상을 지지했던 피아니스트이자 러시아 최초의 여성 작곡가 발렌티나 세로바의 아들로 콘스탄틴 코로빈, 표도르 샬랴핀, 알렉산드르 베누아 등과 함께 동시대 예술의 기준과 방향성을 제시했는데, <복숭아를 든 소녀>는 화가 세로프의 창작 발전 과정에서 첫걸음에 해당하는 작품이다.아브람체보에서
뛰어난 작곡가이자 당대 최고의 음악 평론가였던 그의 아버지 집에서는 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한 창의적이고 비범한 인물들이 끊임없이 모여 음악회와 낭독회를 열곤 했다. 가령 이반 투르게네프 같은 이들. 소년에게는 네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해외로 가서 리하르트 바그너를 방문했던 기억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을 데리고 독일로 갔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예술가 쾨핑의 조언을 들었다. 1874년, 아홉 살의 발렌틴은 어머니와 함께 뮌헨에서 파리로 이사했는데, 당시 일리야 레핀은 그곳에 머물며 <사드코>를 작업하고 있었다. 레핀은 아들의 능력을 충분히 드러내고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었다. 러시아로 돌아온 발렌틴 세로프는 아브람체보로 향했다.
아브람체보는 기업가이자 자선가인 사바 마몬토프의 여름 별장으로 19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정신적, 지적 생활의 중심지였다. 사바 마몬토프는 러시아 예술가, 지식인들을 모아 아브람체보 저택에 창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방문 예술가들에게 재정 문제와 일상생활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브람체보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세로프는 새로운 예술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조성한 창의적인 환경에서 모든 것을 흡수했다. <복숭아를 든 소녀>는 아브람체보의 식탁에서 그려졌고 소녀는 바로 사바 마몬토프의 딸 베라 마몬토바다.<이다 루빈슈타인의 초상>(1910)
세로프는 변화를 통해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색적인 풍경, 삶에의 경외심을 드러내는 역사화 등에도 관심을 두었지만, 그가 명실상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장르라면 단연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내면을 꿰뚫어 보고 이를 단호하게 화폭에 옮겼던 세로프에게 농민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초상화 주문이 쇄도했는데, 가령 <레비탄의 초상>(1893)에서 광선은 방안 어둠으로부터 이 서정적 풍경의 대가가 내뿜는 불안하면서도 병적일 정도로 우수에 찬 특성을 포착한다. 높은 이마와 귀족적인 아름다운 손이 두 개의 빛과 함께 그림에서 두드러지고 다른 모든 것은 차분한 갈색 황혼에 잠겨 있다. 레비탄이 그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했지만 이것이 예술가의 초상화라고 말하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 세로프에게는 친구의 사려 깊음과 끊임없는 슬픔, 우울, 낭만주의를 묘사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그러나 최고의 업적은 ‘살로메’의 이미지를 그린 <이다 루빈슈타인의 초상>(1910)이었다. 이다 루빈슈타인은 발레 루스를 통해 <살로메>로 데뷔한 현대 무용의 프리마 돈나였다.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루스의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은 이다 루빈슈타인의 외모가 패셔너블한 발레 <클레오파트라>와 <세헤라자데>에 제격이라고 여겼다. 카리스마 넘치는 세련미와 아르누보적 시대 취향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본 것이다. 과연 이다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초상화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살로메’에서 ‘일곱 베일의 춤’을 추다가 레온 박스트가 디자인한 투명한 베일마저 벗어 던지고 거의 전라로 앉은 이다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세로프는 캔버스에 예술과 삶을 결합하여 연극 이미지와 발레리나 자신의 세련되고 동양적이며 이국적인 모습을 결합했다. 그는 ‘예술적 진실’과 ‘삶으로서의 극장’의 역설적인 경계에 있는 인간의 벌거벗은 무방비 상태를 드러낸다. 꼬여 있는 녹색 스카프는 뱀처럼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타고 흘러내리고, 유혹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우연히 초상화에 기어든다. 이 그림에는 퇴폐적이고 추악하다는 무자비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폭풍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로프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일러스트풍으로 간결하고 대담하게 그려진 이러한 형식은 ‘스틸 모데른’으로 명명되었다.
세로프의 딸은 이렇게 전한다. “그의 놀라운 진실성과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엄격함은 그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게끔 했다.” 1911년 11월 22일 아침, 세로프는 심장 마비로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