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육체가 쇠락해도 간직되는 아름다움

인생의 '아름다운 날' 바탕은
삶을 갈고닦다가 쌓인 추억들

유창선 문화평론가
그림이든 음악이든, 우리가 예술 작품을 접할 때 가장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작가 혹은 연주자가 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올 때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것만 같던 내 마음이 작품에 담겨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외로운 마음이 치유되고 나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의 힘이 생겨난다. ‘아! 당신도 그랬구나!’와 같은 그런 위안이야말로 바로 예술이 갖는 치유의 힘의 바탕일 것이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포도뮤지엄에서는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피하고 싶은 쇠락의 늪이 아니라, 여전히 ‘나’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시간일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전시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은 앨런 벨처,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정연두, 민예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 & 이반 실, 데이비스 벅스, 시오타 치하루, 천경우다.전시장에서 제일 처음 마주하는 앨런 벨처의 ‘바탕화면’이라는 작품은 JPEG라는 이미지 파일의 확장자가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데 그 이미지 파일들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기억하고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 이제는 열어볼 수도 없고 기억해낼 수 없는 단순한 기호로만 남아 있다. 기억하고 싶은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런 불안을 뒤집어 놓는 것은 사진작가 셰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였다. 그의 어머니는 2015년 혈관성 치매 진단을 받았고, 수십 년간 함께 살아온 모녀의 추억과 감정은 어머니의 기억과 함께 점점 상실돼 가는 듯했다. 어머니 때문에 몇 년간 활동을 중단한 작가는 햇살이 창에 스며드는 어느 오후 문득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 순간 어머니의 삶 속에서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을 포착하기로 결심하고 손에 닿는 모든 카메라로 어머니의 모습을 2년 넘는 긴 시간 동안 기록했다.

어머니는 사진을 찍으러 나가는 순간, 사진을 찍기 위해 앉아 있는 시간을 무척 즐거워했다. 치매에 걸린 사진 속 어머니는 아이처럼 거품 방울 풍선을 불고 있기도 하고, 음식 접시를 바닥까지 핥아먹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꽃향기와 햇살을 즐기고 있다.비록 기억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살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 새를 조각하고 연구하는 학자였던 작가의 어머니는 혈관성 치매 판정을 받은 후에도 새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지금의 어머니는 그 시절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맞다.

어머니를 찍은 온지의 사진 기록들이 우리 마음에 울림을 가져온 것은 그 모습 하나하나가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고, 언젠가는 내게 찾아올지 모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전시회 타이틀에 굳이 ‘어쩌면’이라는 말이 붙은 데는 우리 인생이 무조건 아름다울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과 거리를 둔 것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날들’이 가능하다는 것은 현실과는 유리된 거짓말이 아닌가.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의식하며 노력한 사람에게만 인생은 아름다운 날들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전시장을 떠나면서 평소 기억하던 독일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나이 듦에 맞서 싸우느라 모든 힘을 낭비하는 대신, 주름살에 새겨진 삶을 자신 있게 내 앞으로 가져오고 싶다.” 그런 좋은 기억을 젊은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장차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을 만들기 위한 길이 될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