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양지로 나온 美·英 정보수장

영국 해외 첩보기관인 비밀정보국(MI6)의 모토는 ‘항상 비밀’(Always secret)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Sember Occultus’다. 1909년 창설된 MI6가 정부 조직으로 공식화된 1992년 전까지 대부분 영국인이 MI6 존재를 몰랐을 정도로 MI6의 비밀주의는 견고하다. M16 요원의 신원도 국가 기밀로 여기는 전통이 강해 여전히 MI6국장은 이름 대신 초대 수장 맨스필드 커밍의 성에서 따온 ‘C’로 불린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주의 역시 못지않다. 공식 모토는 ‘국가의 임무, 정보의 중심’(The Work of a Nation, The Center of Intelligence)이지만 ‘익명의 열정’(Passion for anonymity)이 비공식 모토로 통한다. 비밀주의 기조로 CIA 수장의 동선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비공개다.이런 두 나라의 정보기관 수장이 공식석상에 섰다. 그것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공동 명의의 기고문을 싣고 FT 주최 포럼의 대담자로 참석했다. 1947년 CIA가 생긴 이후 두 조직의 수장이 공개 행사에 함께 참석한 건 처음이다. FT는 두 수장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것은 세계가 전례 없는 위협에 직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제기된 위협은 러시아였다. 윌리엄 번스 CIA 국장은 “2022년 가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뻔했다”고 하자 리처드 무어 MI6 국장도 “러시아의 핵 위협과 도발은 계속될 것”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은 중동 정세에 대해서도 낙관론을 경계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비롯한 전쟁 당사자들이 90%가량 합의에 도달했지만 가장 어려운 10%에서 난관에 봉착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최대 리스크는 중국의 부상이라는 점에도 이견이 없었다. 이 때문에 CIA는 중국 관련 예산을 3년간 3배로 늘렸다고 한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겁먹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여러 위협을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했다. 미·영 정보당국 수장의 경고대로 우리는 이런 위협에 제대로 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인설 논설위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