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 살고 사랑에 산 한국의 목소리, 소프라노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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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류태형의 K-클래식 인물열전소프라노 조수미가 세계 무대에 데뷔한 해는 1986년이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에서 오페라 ‘리골레토’ 중 질다 역으로 처음 무대에 섰다. 이탈리아인을 제외한 외국인들도 주역으로 데뷔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데 동양인인 조수미가 질다 역을 꿰찬 일은 기적으로 여겨졌다. 조수미는 떨리지 않았다.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분장실에서 대기하며 한시라도 빨리 무대에 서고 싶었다. 결과는 대성공. 가져가기 힘들 정도의 꽃다발과 화분으로 분장실이 뒤덮였다. 조수미는 1962년 ‘조수경’으로 태어났다. 월급쟁이 직장인 부모님은 전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첫 딸 수경은 특출났다. 동네 할머니들은 “아이가 어린 시절부터 너무 영리하면 단명한다”며 “뭐든 두드려라. 액운이 떠나간다”고 훈수를 뒀다. 겁이 덜컥 난 부모님은 수경에게 피아노를 시켰다. 건반을 두드리는 악기였으니까. 수경은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으면 바로 피아노를 치면서 따라 불렀다. 사실 성악가로서의 운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됐다. 오페라 애호가였던 어머니는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의 노래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태교를 했다. 딸이 태어나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성악가의 꿈을 이루게 하리란 마음도 먹었다. 의욕적인 어머니 덕에 수경은 안 해본 게 없었다. 피아노, 발레, 가야금, 피겨스케이팅은 물론이고 미술학원, 웅변학원도 다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간 웅변대회에서 목소리 연구가가 수경의 웅변을 듣고 ‘목소리가 너무 독특하다. 연구 대상’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 대회에서 초중고대학생 등 모든 연령대 참가자들을 통틀어 수경이 대상을 받았다.
소프라노 조수미
어린 시절 수경은 음악인이나 예술인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되고 싶은 사람은 동물 보호단체의 일원이나 수의사, 선교사 등이었다. 어려운 사람들, 말 못하는 동물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존경했다. 커서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수경은 동물 특히 개와 고양이를 좋아했다. 떠돌이 개를 발견하면 집에 데려와 돌봐주곤 했다. 수경은 정의로웠고 열정적이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스타일이었다.
선화예고에 진학한 수경은 합창단 활동에 열중했다. 솔로도 중요하지만 함께 만들어내는 음악이 아름답고 중요하다는 걸 합창 활동을 하면서 유병무 선생님께 배웠다. 서울대 음대 81학번으로 수석입학한 수경은 은사 이경숙 선생님께 독일 가곡과 오페라를 배웠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슈베르트, 브람스, 볼프 등 심오한 독일 리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학은 외향적이고 표현이 강한 나라인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다. 입학 직후 연애에 빠져들었던 수경은 강의에 거의 안 들어갔고, 전과목 F학점을 받는다. 게다가 당시 서울대에 있었던 1년 동안 공부를 못하면 제적되는 제도의 희생양이 됐다. 교수님은 재능이 아깝다며 유학을 주선해주셨고, 그렇게 떠밀리듯 로마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으로 떠났다. 1983년이었다. 갓 스무 살. 스쿠터인 ‘베스파’를 빌려서 뒷자리에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를 뒤에 태우고 스페인광장을 신나게 돌아다니곤 했다. 바르톨리와는 훗날 벨리니 ‘노르마’ 앨범에 함께 출연했다.
수경은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세계 활동을 위해 서양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수미’로 개명하고 공부에 열중한다. 5년제 음악원을 2년만에 졸업했다. 음악사, 무대학, 서양논리, 종교학 등을 이탈리아어로 시험을 봐야 했기에 어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2년 만에 음악원을 끝내고 바로 국제 콩쿠르 준비를 했다. 1등을 하면 상금을 받으니까. 다행히 입상을 했고 그녀의 이름 ‘수미’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수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펼쳐진다.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에게 오디션을 받게 된 것. 중 고교 시절 책상 위에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브로마이드가 걸려있었을 정도로 존경하던 거장이었다. 막상 가까이서 본 카라얀은 친근하게 다가왔다. 마치 친척 중의 한 사람처럼. 노 거장은 수미를 굉장히 예뻐했다.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목을 혹사할 수 있으니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역할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또 음악이라는 팽팽한 줄을 놓아서 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언급한대로 조수미는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배역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오페라 음반의 역사에서 전설적 소프라노 크리스티나 도이테콤과 쌍벽을 이루는 밤의 여왕으로 손꼽힌다. 게오르그 숄티, 아르맹 조르당, 아르놀트 외스트만 등이 앞다퉈 조수미를 밤의 여왕으로 기용했다. 밤의 여왕은 힘든 배역이다.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당일 컨디션이 안 좋으면 소리가 잘 안 나온다. 조수미 스스로도 ‘부자연스럽다. 비인간적이다’라고 지칭했다. 조수미는 밤의 여왕이 되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다. 요란한 무대 메이크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화려한 왕관과 의상에다 날아다닐 수 있게 와이어장치를 달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공중그네를 타고 날아다니며 불렀다. 위험하기도 해서 생명보험에 사인하면서 출연했다. ‘밤의 여왕’ 외에도 조수미는 극적인 부분과 코믹한 부분이 잘 섞여있는 배역을 잘 불렀다. ‘리골레토’의 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중 루치아,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같이 비운의 여성들, 끝내 죽음을 선택하는 역이 장기였다. 오펜바흐 ‘호프만의 이야기’ 중 올랭피아,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 중 아디나‘, ’연대의 딸‘의 마리도 조수미와 어울렸다.
공연할 때마다 많은 준비를 하는 조수미는 무대 위에서 객석의 관객들과 교감을 나눈다. 모든 것을 주고 난 뒤 비워진 자신을, 관객이 그녀에게 준 사랑으로 채운다. ‘많이 주면 줄수록 돌아오는 사랑은 더 커진다’는 그녀의 지론은 공연예술의 중요한 철학처럼 다가온다. 조수미는 외국 무대에서 우리 가곡을 꼭 불렀다. 젊은 시절부터 한국인도 없는 곳에 떨어져 살다보니 고국 생각도 많이 났다. 조수미가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한국이란 나라는 유럽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남한인지 북한인지 구별도 못하는 그들 앞에서 조사를 받고 약소국민의 설움도 당했다. 무대에서 우리 가곡을 부를 때 그 설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렸다. 클래식/성악 분야에서 자기 몫을 단단히 한 조수미는 크로스오버나 영화음악, 드라마 음악 등도 마다않고 뛰어난 해석으로 주목받았다. 이는 조수미를 통한 클래식 음악 입문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2000년에 나온 그녀의 크로스오버 음반인 ‘온리 러브’는 백만 장 넘게 팔렸고, 드라마 ‘명성황후’에 삽입된 ‘나 가거든’이란 곡은 드라마의 인기를 능가할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새로운 곡에 목소리가 맞을지 연습해보고 신중에 신중을 기한 까다로운 준비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K클래식에서 성악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를 조수미는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래 예술적인 방면에 재능을 가진 데다가, 기질이 성악의 나라 이탈리아와 비슷하다고 분석한다. 반도 국가에 극적인 면도 있고 정도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성악계의 참신한 젊은 후배들을 발굴하기 위해 조수미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2017년 BBC 카디프 싱어즈 오브 더 월드, 2022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며 바리톤 김태한 등 신성의 탄생을 도왔다. 그러다 아예 본인의 이름을 딴 콩쿠르를 만들었다. 올해 여름 프랑스 중부 루아르 지방의 옛성인 ‘샤토 드 라 페르테 앙보에서 개최된 제1회 조수미국제성악콩쿠르가 그것이다. “지구상에서 내가 사라지더라도 계속될 수 있는 콩쿠르로 만들 것”이란 조수미의 말이다. 그녀의 말을 논외로 하더라도, 조수미라는 이름은 곧 한국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길이 남을 듯하다.
류태형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