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영예로운 노정, '울림길'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다. 출퇴근·등하교 길부터 신부가 신랑에게 다가가는 ‘버진 로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이름의 예수가 걸은 ‘고난의 길’까지…. 장기 이식의 세계에는 ‘아너워크(Honor walk)’라는 길이 있다. 장기기증자가 잠시 머물렀던 중환자실을 출발해 수술실로 향하는 몇백m도 되지 않는 길이다.

기증자가 수술실로 이동하는 복도 양쪽에서 기증자 가족과 의료진이 그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길이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의 길을 영웅의 길로 바꿔주는 것이 아너워크다. 아너워크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유럽 등에서 장기 기증자를 존중하고 기리며, 슬픔에 빠진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시작됐다. 아너워크는 의료진을 포함한 병원 직원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다. 기증자 가족에게 혼자가 아니고,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음을 인지하도록 해준다. 의료진에게는 기증 과정에 함께 참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국내에선 지난해 9월, 한국장기조직기증원과 서울대병원 장기이식센터가 함께 아너워크를 바꿔 부르기 위한 우리말 공모전을 열어 ‘울림길’을 선정했다. 많은 사람을 감동으로 크게 울리고 많은 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뇌사자 장기 기증은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는 커다란 선물이지만, 기증을 결정한 가족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의 사별 과정이다. 기증을 결정한 이후에도 그 가족은 본인들의 결정이 잘한 것인지 많은 망설임과 우려의 시간을 보내게 되기도 한다. 이럴 때 많은 의료진과 직원들이 함께 응원하고 있다는 따뜻한 마음을 표현해 준다면 기증자 가족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지난 7월 35세의 태국 여성 푸리마 렁통쿰쿨이 한국 여행 중 갑작스럽게 쓰러져 뇌사 상태가 됐다. 급히 한국으로 날아온 가족들은 렁통쿰쿨이 절망 속에 있는 환자들을 살리는 기적을 바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타국에서 장기 기증을 결정했다. 렁통쿰쿨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섯 명의 환자에게 생명을 나눠주고 짧지만 의미 있는 삶을 마무리했다. 수술실로 이동하는 길을 가족들이 슬픔을 억누르며 뒤따랐고, 담당 의료진과 직원들이 복도 양쪽에서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지난여름 휴가차 방문한 미국 뉴욕 맨해튼의 내셔널911 뮤지엄에서, 울림길을 지나서 생명나눔을 실천하신 기증자분들과 유가족에게 해 드리고 싶었던 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크나큰 축복이었다.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워버릴 날은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