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바보' 백남준으로부터 조민석까지...광주비엔날레 30년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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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 30년 역사 돌아보니‘예향(藝鄕)’.
광주(光州)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많고,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고을이라는 의미다. 서쪽의 광활한 나주평야와 동쪽의 무등산 사이에 들어선 광주는 예로부터 호남지방 교통의 요충지였다. 물자가 교차하는 곳에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에 예술이 싹트기 마련. 르네상스 시기의 베네치아와 피렌체, 20세기 뉴욕이 그랬다. 광주가 현대적인 의미의 ‘예향’으로 거듭난 것은 1995년부터다. 빛고을 광주는 현대사의 어둠을 견뎌내고 있었다. 가족 친지를 잃은 애환과 분노를 예술로 승화할 창구가 필요했다. 지역 미술계와 백남준 등 국내외 인사들이 발 벗고 나섰다. 그렇게 한국 최초의 국제비엔날레가 광주에서 열렸다.
국내에서 비엔날레라는 용어조차 낯설던 시절이다. 그나마 익숙한 ‘그림’이 아니라 설치작품 위주로 구성된 전시장은 난해했다. “이런 것이 작품이면, 나도 만들겠네”라는 냉소적인 반응도 심심찮게 나왔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나도 하겠네’라는 조롱은 거꾸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미술의 장을 열었다. ‘세계 5대 국제미술전’ ‘아시아 최대 비엔날레’라는 수식어까지 멀리 나갈 필요가 있을까. 오늘날 광주의 성공사례를 따라 열린 한국의 비엔날레는 서울·부산·대구·청주·창원·제주 등 10여곳에 이른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가 9월 7일부터 12월 1일까지 86일간의 대장정에 올랐다. ‘판소리-모두의 울림’이란 대주제로 세계 30개국 출신의 작가 72명이 모였다. 광주 용봉동 광주비엔날레 전시관과 양림동 소리 숲 등 8개 전시 공간에 들어선 작품만 300점이 넘는다. 같은 기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시립미술관 등에선 31개 국가와 도시가 참여하는 ‘미술 올림픽’이 열린다. 올가을 광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미술로 무르익은 예향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터널을 헤쳐 나간 1980년대 광주에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시절이다. 냉전의 해빙 기류 속에 열린 서울올림픽의 축제는 남 얘기 같았다. 꿈틀대는 분노와 예술혼, 세계화 대열에 합류하려는 도시의 열망이 맞물렸다. 광주비엔날레가 태동한 배경이다.
![백남준 '고인돌'(1995) 상세 이미지. 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시로 선정된 광주비엔날레 30주년 기념 아카이브 특별전 '마당'에 설치됐다.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9/01.37975114.1.jpg)
이야기는 1992년 서울의 한 호텔에 머물던 백남준으로부터 시작한다. 전남 출신의 한국 1세대 조각가 김영중이 그를 찾아와 대규모 국제미술제를 제안했다. 한국에 그럴듯한 국제비엔날레가 없으니, 그 역할을 광주에서 해내겠다는 구상이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백남준은 이 소식이 반가웠다. 그렇게 이들은 물밑 작업에 돌입했다.30년 전만 해도 비엔날레는 한국에서 생소한 개념이었다. 광주·부산비엔날레를 비롯해 대구사진비엔날레·청주공예비엔날레·창원조각비엔날레 등 국제미술전이 주요 도시마다 있는 요즘과 다르다. 백남준이 1993년 독일관 대표작가로 베네치아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자 비로소 국민적인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2년 뒤 베네치아비엔날레에 한국관 건물이 입성한 것도 비엔날레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데 한몫했다.
서울과 춘천 등 경쟁 후보지들도 있었다. 김영중 조각가와 강봉규 전 광주예술인총연합회장 등 지역 미술인들이 먼저 움직였다. 강운태 당시 광주시장이 정치권의 표심 공략에 나섰다. 현지 미술인들이 백남준의 해외 네트워크까지 동원해 마련해둔 기획안이 저력을 발휘했다. 1994년 11월 문화체육부가 개최를 승인했고, 이듬해 9월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막을 올렸다.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다. 첫 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에 맞춰 광주미술인공동체는 '안티 비엔날레'를 표방한 광주통일미술제를 개최했다. 광주비엔날레가 이른바 '주류'인 서구 미술계를 답습한다는 비판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광주 망월동 5·18구묘지 일대에서 솟대와 만장을 꽂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규명과 통일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글을 적었다.
비엔날레에 대한 반대 의식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광주비엔날레의 기틀을 형성했다. '함께 의논해서 보다 심도 있는 비엔날레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안티 비엔날레를 주도한 강연균 화백 등이 제2회 광주비엔날레 집행부로 위촉되면서다. 김홍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은 광주비엔날레재단과의 인터뷰에서 "안티 비엔날레는 광주비엔날레의 개념적인 진폭을 확장했다. 글로벌리즘(비엔날레)과 로컬리즘(광주 정신)이 합쳐져 '글로컬리즘'을 만들어낸 사례"라고 평가했다.
특히 광주비엔날레는 그동안 세계 미술 무대에서 소외됐던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을 발굴해내는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지난 30년간 참여한 작가 중 30% 이상이 30대인 것이 이를 방증한다. 2014년 베네치아비엔날레 건축전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큐레이터 후 한루 등이 광주비엔날레를 발판으로 성장했다.
광주비엔날레는 국내외 사정에 따라 여러 변화를 겪었다. 당초 2년마다 홀수 해 가을에 개최할 계획이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과 시기를 맞추기 위해 제3회 행사부터 짝수 해로 변경됐다.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을 건너뛰고 다시 홀수 해인 2021년에 열렸다. 그 여파로 직전 행사가 지난해 열렸다.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이례적으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열렸다. 창설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다. 역대 최대규모인 151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스타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의 지휘 아래 30개국 출신 작가 72명이 모였다. '판소리'라는 대주제로 광주의 경찰서와 옛 한옥 등 도시 곳곳이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