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천국' 떠나는 기업들…무슨 일이 있었길래 [송영찬의 실밸포커스]

미국 실리콘밸리는 전 세계의 가장 대표적인 ‘스타트업 천국’이자 테크 업계의 심장부 같은 곳입니다. 반도체 재료 실리콘(Silicon)과 계곡(Valley)을 합친 단어의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터줏대감과 같던 기업들이 하나 둘씩 실리콘밸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유도 제각각입니다. 도대체 왜 이 기업들은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걸까요?

우수 인재와 막대한 자금이 키워

기업들이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기업들이 왜 실리콘밸리에 먼저 자리 잡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실리콘밸리의 시조’는 휴렛팩커드(HP)입니다. HP는 무려 1939년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의 한 차고에서 탄생했습니다. 팰로앨토는 스탠퍼드대가 있는 도시인데요. 스탠퍼드대 동기였던 HP의 창업자 휴렛과 패커드가 이곳에서 HP를 창업하며 실리콘밸리가 시작됩니다.

HP를 시작으로 한적한 농촌이었던 실리콘밸리는 세계 IT 산업의 중심지로 변모했습니다. 구글, 애플, 엔비디아, 인텔, AMD, 메타, 시스코, 넷플릭스 같은 회사가 모두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 아직까지도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HP처럼 '서부의 하버드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가 실리콘밸리 탄생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 멀지 않은 곳에 UC버클리도 위치해있습니다. 우수한 인재가 끊임없이 유입될 수 있던 배경이 됐습니다.
스탠포드대 캠퍼스./ 사진=AP
실제로 실리콘밸리 기업 창업주 상당수가 스탠퍼드대 출신인데요. 젠슨 황도 스탠퍼드대에서 대학원을 나왔죠. 2017년에 비즈니스인사이더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출신 대학 탑25를 발표했는데 UC버클리와 스탠퍼드대가 각각 1,2위를 차지했습니다.

여기에 이 지역에 기반을 둔 많은 벤처캐피탈(VC)이 공격적인 투자를 했습니다. 세콰이어캐피탈, 안데르센호로위츠, 그레이록 같은 유명 VC가 모두 이곳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거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주요 은행들, 웰스파고, 뱅크오브아메리카도 모두 본사를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있기도 합니다. 우수한 인재뿐 아니라 투자 자금도 끊임없이 유입된 덕분에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각종 규제에 과도한 PC주의에 염증

실리콘밸리를 와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실리콘밸리엔 사실 고층 빌딩이 별로 없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중심도시라고 할 수 있는 산호세도 다운타운에조차 그리 높은 빌딩이 많지 않은데요. 기업들이 워낙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는 데다가 산호세 국제공항 때문에 고도제한도 넓은 지역에 걸쳐 있어서입니다. 문제는 안 그래도 고소득층이 몰려사는 지역인데 주택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서 주택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다는 점입니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에 따르면 지난달 산호세의 주택 판매가 중간값은 150만달러(약 20억원)였습니다. 그런데 이 중간값이 20년 임대료 평균의 2.2배에 달한다는 겁니다. 산호세는 뉴욕,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미국 전역에서 임대료가 가장 비싼 지역인데, 집값 상승률이 워낙 높아서 임대료 상승률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이게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심화됐는데요. 산호세의 주택 가격 중간값이 2019년에는 20년 임대료의 1.6배에 불과했는데 엄청나게 뛴거죠. 이게 대도시라서 그런 게 아니고 휴스턴이나 시카고 같은 미국 다른 대도시의 경우 20년 임대료가 주택 가격 평균보다 높거나 비슷한 수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집을 사기 어려운 곳이 됐다는 거죠.
테슬라는 2021년에 본사를 실리콘밸리에서 텍사스주 오스틴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머스크 CEO는 “베이 지역(샌프란시스코 광역권)의 주택 가격이 높아 먼 곳에서 출근하는 직원들이 있다”며 “실리콘밸리에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HP, 팰런티어, 오라클도 비슷한 시기 모두 본사를 옮겼습니다. 직원들은 주택 가격에 신음하는데 기업들은 캘리포니아의 높은 세금에 신음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주별로 세율이 다른데요. 캘리포니아의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은 13.3%에 달합니다. 반면 텍사스는 0%입니다. 직원들도, 기업 CEO들도 내는 세금이 감당이 안 됐던 겁니다.
사진=AP
여기에 최근 한 가지 이유가 더 생겼습니다. 바로 캘리포니아주를 강타한 '워키즘'입니다. 워키즘은 깨어있다(woke)는 뜻의 단어에서 시작한 진보주의 움직임인데요. 캘리포니아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주로 꼽힙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의 텃밭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움직임에 대한 반발도 커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개빈 뉴섬 주지사가 '성소수자 학생 관련법'을 시행하자 머스크 CEO가 “캘리포니아에서는 주 정부가 당신의 자녀를 빼앗아 갈 것”이라며 스페이스X와 X의 본사를 텍사스로 이전한다고 발표한 겁니다. 이 법은 교사가 학생의 성 정체성을 학생 본인의 허락 없이는 부모에게도 알리는 것을 금지하는 게 골자인데요. 머스크는 이 법에 대해 “가족과 회사 모두를 공격했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여기에 각종 규제까지 심화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캘리포니아 주의회 하원은 AI 규제법을 통과시켰는데요. 이 법은 주 법무부 장관이 AI가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일으킬 경우 기업을 고소할 수 있도록 했고, 제3자 감사 인력이 AI 기업의 안전 관행을 평가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샘 올트먼이 이끄는 오픈AI는 법 통과 이전부터 공식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는데요. 올트먼 CEO는 최근 인터섹트24라는 자율주행 관련 행사에 화상으로 참석해서 이 법에 대해 "매우 나쁜 규제"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진보적인 분위기가 지금의 실리콘밸리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지만, 되레 이제는 기업들이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이유가 된 겁니다.

실리콘밸리=송영찬 특파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