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당당하게 들어가 7년 동안 2조원 어치 예술품 훔친 황당 실화 [서평]

예술 도둑

마이클 핀클 지음
염지선 옮김/생각의힘
303쪽|1만7800원
Getty Images Bank
"미학은 윤리보다 앞선다."

아일랜드의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예술이 도덕이나 윤리가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마이클 핀클의 저서 <예술 도둑>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범법자가 된 프랑스 남자 스테판 브라이트비저의 이야기다. 브라이트비저는 역사상 가장 많은 예술작품을 훔친 도둑이다. 책에 따르면 그는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200여 회에 걸쳐 300점 이상의 작품을 훔쳤다. 그 가치는 대략 20억 달러(2조 7000억원)에 달한다고. 그가 훔친 작품 리스트를 보면 가히 충격적이다. 루벤스의 집에서 훔친 '아담과 이브' 조각상부터 18세기 초 호두나무로 만든 수발총, 크리스토프 슈바르츠의 1550년 유화 '피에타' 등등…. 모두 인류가 남긴 최고의 명작과 명품들이다.

심지어 브라이트비저는 도둑질을 할 때 변장하지 않았고 몰래 들어가지도 않았다. 대낮에 당당하게 입장했다. 잘 드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갖고, 그의 조력자인 여자친구와 함께 작품을 훔쳤다. 훔친 작품들은 그의 다락방에 모두 봉인해 놨다. 그의 진술을 보면 그에게는 이러한 행위가 도둑질이 아닌 수집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 해방가라 자처한다. 자신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선택받은 사람이며, 돈 때문이 아닌 오로지 아름다움에 둘러싸이고자 이 모든 것을 훔쳤다고 주장한다.
책은 이 희대의 황당한 인물과 황당한 사건의 이면을 파헤친다. 삶의 연대순으로 추적하는 38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브라이트비저가 어떻게 작품을 훔치고 보관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파국에 이르게 되는지 생생하게 그려낸다. 경찰·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나온 수많은 보고서와 증언들, 주변 사람들을 통한 심층 취재 등을 통해 이 남자는 성향은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고, 그의 진짜 동기는 무엇인지 깊게 파고든다.책에 따르면 브라이트비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17~18세기의 진귀한 보물들과 세계 각국의 명작들을 자신의 집에 가져다 놓곤 했다. 브라이트비저는 조금 독특한 아이었다. 또래와 어울려 놀기 보다는 박물관에서 고요하게 홀로 시간을 보내곤 했고 역사적인 조각상과 유물 등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얼어붙었다. 그는 그렇게 예술품에 빠져있는 시간을 "과거로 피신했던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시간이 지나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는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남자 아이가 아니었고, 그저 가치있는 작품들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는게 제일 행복한 몽상가였다. 잘난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아들의 부족한 행동을 훈육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집 안의 모든 보물들을 가져가 버렸고, 브라이트비저는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브라이트비저는 유일한 보물상자를 빼앗긴 어린 아이 상태로 어른이 된다. 자기가 가졌어야할 보물들을 뺏겼다는 피해의식과 아름다움를 향한 커져가는 욕망은 그를 어둠의 길로 유혹했다. 그의 유일한 행복이자 안식처였던 예술작품은 그렇게 그의 삶을 파괴한 것이다.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브라이트비저의 주장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대부분 궤변이다. 자기 도취에 빠진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를 단순한 광인으로 정의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어쩌면 인류의 보물들이라 불리는 수많은 예술품들에는 어떤 저주가 걸려있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이 가진 그 파괴적인 속성에 대해 일견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소설보다 훨씬 소설같은 실화를 흡인력있게 써내려간다. 그의 짜릿한 도둑질(자신은 수집이라 여기는)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박물관이 아니라 그의 비밀 다락방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