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는 그렸다, 겨울이면 천지가 어둠뿐인 ‘북극의 빛’으로

[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영화
그리고 에드바르 뭉크전에 부쳐

에드바르 뭉크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뭉크의 작품 속에서
뭉크의 내면이 보인다
백야. 나에게는 단어로만 알고 있는 현상이다. 어떤 것인지 의미는 알고 있으나 경험치가 없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극야.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30 days of night)>는 일 년에 30일, 극야를 맞는 알래스카 배로우를 배경으로 뱀파이어에 맞서 목숨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강한 긴장감을 느꼈던 건 뱀파이어 쪽보다는 극야 때문이었다. 빛이 없으면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빛이 강하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전자이다. 그러니 30일 동안 극야를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배로우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은 해가 뜨지 않는 한 달간 마을에 머무는 것이고 극야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한 달을 지내고 마을로 돌아온다. 그래야 할 것이다. 빛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절망과 공포를 그리다

‘여름에는 절대 지지 않고 겨울에는 절대 뜨지 않는 태양의 빛, 북극의 빛’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에드바르 뭉크는 바로 그런 ‘북극의 빛’에서 그림을 그리고 판화를 찍어낸 사람이다.뭉크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절규>이겠다. 어느 날 뭉크는 친구들과 길을 걷다가 문득 불안에 빠져 걸음을 멈추고 만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나는 두 친구와 길을 걸었다. 해가 지자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멈춰 서서 죽음에 지쳐 울타리에 기댔다. 짙은 남빛의 피요르드와 도시 위로 불타는 피의 혓바닥이 맴돌았다. 친구들은 계속 걸었고 나는 불안에 떨며 뒤에 남았다. 그리고 나는 거대하고 끝없는 비명이 자연 속을 지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The Scream)' 1910년 / 사진. ©Munchmuseet
에드바르 뭉크. 그는 평생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떨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규>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그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이 작품마저도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공포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어린 시절부터 그는 죽음이나 병에 가까이 있었다. 5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박봉의 군의관이었던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빈민가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내와 사별하고 몸이 약한 아이들을 돌보며 아버지는 아마도 깊은 절망과 좌절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뭉크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침대맡에서 늘 책을 읽어주었다. 죄와 형벌에 대한 이야기를. 또한 아이들을 돌봐주던 숙모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지지하고 작품을 모아주었다. 어린 뭉크는 노르웨이의 이야기 속 요정과 천사들을 그렸다. 어쩌면 뭉크는 그 존재들을 그림으로써 가족들의 안녕과 건강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뭉크의 가족들에게 짙게 드리운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는 쉬이 가시지 않는다. 소피가 15살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다른 아이들도 병에 걸린다. 뭉크는 거울 속의 제 모습에서 죽은 가족들의 얼굴을 보았다.뭉크의 작품들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백야와 극야가 번갈아 찾아오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 병으로 가족들을 잃은 경험은 뭉크에게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뭉크의 내면은 <절규>뿐 아니라 <불안>, <병든 아이> 등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훗날 스스로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고, 여동생 라우라마저 정신병이 발병했으니 평생 그를 따라다닌 공포와 고통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 I (The Sick Child I)' 1896년 / 사진. ©Munchmuseet
병든 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뭉크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 <병든 아이> 역시 단순히 병든 아이를 그린 그림이 아니다. 뭉크는 그 아이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해 놓은 것이다.

뭉크는 작품에 슬픔을 그려 넣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절망과 공포를 딛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 뭉크는 과거의 시간이 필요했고 자신을 쫓는 유령에 대해 써야 했으며 순간을 화폭에 가두어야 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그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삶에 대한 그의 실낱같은 희망을 찾게 된다. 그가 평생 느낀 공포와 불안과 위태로움이 가녀리고 섬세한 그의 정신을 타고 관람객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뭉크의 작품은 판화가 많아서 같은 그림이 여러 버전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절규>도 넉 점이 있다. 오슬로 국립박물관에 템페라와 파스텔로 그려진 한 점,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에 석판화 본과 템페라 본, 파스텔 본이 있다.

<병든 아이>와 <마돈나>, <불안>, <뱀파이어> 등 그의 다른 대표작들도 따라서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 색채에 따라 같은 그림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런저런 색으로 작품을 찍어보면서 뭉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매력적인 여인들을 그리다

19세기 말은 노르웨이가 아직 스웨덴에 속해 있던 때이고 크리스티아니아였던 오슬로는 산업사회로 이행하고 있었으며 당시 유럽의 사조였던 보헤미안이 노르웨이에 흘러들어오던 때였다. 뭉크는 이 시기에 여자들을 만난다. 노르웨이 보헤미안의 뮤즈라고 할 수 있는 오다 라손, 그의 첫사랑 밀리 탈로, ‘두하’라 불린 다그니, 툴라 라르센.

뭉크의 그림에 그녀들의 이미지가 투영되었다. 카리스마 넘치고 매혹적인 여인들의 모습. 여인들은 뭉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매혹의 대상이었고 자유분방한 여인들의 마음에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그 경험과 느낌이 작품으로 남은 것이다.

뭉크의 <뱀파이어>는 바로 이런 강렬한 여인의 이미지가 담겨 있는데 뭉크 자신은 이 그림을 ‘사랑과 고통’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여인들은 알 수 없는 매력으로 가득 찬 대상, 이해할 수 없는 매혹을 지닌 대상이 아니었을까. 붉고 긴 머리카락의 여인, 남자의 목을 감싸고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에는 여성을 두려워했던 뭉크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에드바르 뭉크 '뱀파이어(Vampire)' 1893년 / 사진. ©Munchmuseet
시간은 뭉크에게 특별했다

그는 노르웨이 깊은 곳으로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난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오랜 시간을 따라나선 곳은 친가의 뿌리가 있는 ‘보고’였다. 그곳에서 그는 대대로 이어져 온 선조들의 시간과 지금 자신의 시간이 이어져 있음을 깨닫고 일면 안심했을 것이다. 지금의 시간이 과거의 반영체임을 알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순간을 가두고자 했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그의 마음은 두어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뭉크는 모든 것을 보관했다고 한다. 현재는 곧바로 과거가 될 것이며 과거가 된 시간을 묶어 두기 위해 그리고 과거로 흘러 들어간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떠했으며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작업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보관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는 작품이 하나 팔리면 새로 한 장을 그렸다고 한다. 적정 수준의 정량이 채워져야 마음의 무게와 부피를 잃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일까. 일종의 집착처럼 보이기도 하고 편집증처럼 보이기도 하고 징크스 같기도 한 행동 역시 뭉크의 삶을 관통하는 공포와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린다면 스스로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무엇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울과 마비와 환각과 알콜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서도 병실을 작업실로 쓰며 자신의 삶을 견지했던 뭉크는 결국 그의 의지와 결심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어 퇴원을 했고 노르웨이로 돌아가 백마 루소와 몇몇 개들과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많은 것에 대한 공포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 했던 뭉크, 작품 속에 자신을 투영했던 뭉크 ...이 세상에서 그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계속 움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매혹적이고 두려운 오로라 같은 것이었을까? 그의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하고자 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장’을 추구했던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신지혜 칼럼니스트·멜팅포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