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갈망이자, 끝없는 싸움"... 78세 독일 '백발 화가'의 질문들

대전 동구 헤레디움에서
'죄와 신화, 그리고 다른 질문들' 열고 있는
'독일 1세대 작가' 마르쿠스 뤼페르츠를 만나다
대전 동구 헤레디움에서 개인전 '죄와 신화, 그리고 다른 질문들'을 열고 한국 관객을 만나는 작가 마르쿠스 뤼페르츠. 그가 지난 3일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신사가 작품 앞에 섰다. 올해로 78세인 그는 아직도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에 열중한다. 음악도 만들고, 시도 쓴다. 무대예술에도 진출했다. '기존 예술가들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그는 '독일 1세대 예술가' 마르쿠스 뤼페르츠. 9월부터 대전 헤레디움에서 개인전 '죄와 신화, 그리고 다른 질문들'을 열고 한국 관객에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쳐놓고 있다. 전시 개막 직후, 전시장을 찾아 뤼페르츠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는 대신 "메시지보다는 회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며 입을 뗐다. 이처럼 뤼페르츠는 그림 속 내용이나 의미가 아니라 색과 형태, 이미지 그 자체에 중심을 두고 작업을 펼쳐 온 화가다. 작업을 시작하고 줄곧 '회화를 위한 회화'라는 슬로건을 외치기도 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회화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라며 "의미나 메시지는 사진으로도 전달할 수 있지만, 이미지, 색채 등은 오직 회화에서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마르쿠스 뤼페르츠, "Prayer in the Forest", 2017.
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는 ‘디티람브’. 그가 새롭게 창조한 회화의 개념이다.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구상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뤼페르츠는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가 읊었던 즉흥적인 시 '디티람보스'가 구상적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이었다는 데에서 영감을 받아 유래했다"며 "취해서 부르는 시 속 디오니소스의 열정이 내가 회화를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고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 문화를 경외한다'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고대 그리스 신화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이에 뤼페르츠는 "이상적인 비율, 색감 등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미학이 유래됐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전시에 나온 작업들엔 고대 그리스의 이상을 선보이고자 했던 나의 노력이 담겼다"고 했다.
마르쿠스 뤼페르츠, "Idyll (P.B.)", 2022.
그는 어릴적 전쟁통에 피난을 다니며 지냈다. 하지만 그는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모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뤼페르츠는 "피난을 갈 당시 나는 6살이었는데, 트라우마보다는 '어드벤처' 같았다"며 "그 기억이 직접적으로 내 예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새로 발명한다'라는 정신으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앞의 나에게만 집중할 뿐이다"라고 덧붙였다.뤼페르츠는 1988년부터 모교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28년 동안 젊은 작가들을 키워냈다. 그는 '젊은 작가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존경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 작가일수록 스승이나 선대 작가들에 대한 존경이 필요하다"며 "앞선 예술가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전 동구 헤레디움에서 개인전 '죄와 신화, 그리고 다른 질문들'을 열고 한국 관객을 만나는 작가 마르쿠스 뤼페르츠. 그가 지난 3일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마르쿠스 뤼페르츠에게 한국은 '거리는 멀지만, 마음으로는 가까운 나라'다. 그는 "28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 교수들과도 깊은 친분을 쌓았다"며 "심지어 6년 동안 태권도 선생님도 있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뤼페르츠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인이 되어있었던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짧은 일정 동안 한국의 문화예술을 최대한 경험하기 위해 단 하루도 쉬는 날을 만들지 않았다. 뤼페르츠는 "이번 한국 방문 전부터 한국 예술에 대해 공부했다"며 "일정 동안 현대미술관이나 절을 찾았고, 앞으로는 여러 갤러리를 방문할 예정이다"라고 했다.뤼페르츠가 대전 헤레디움을 택한 덴 이 건물이 가진 역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헤레디움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꾼 곳. 뤼페르츠는 "나는 과거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며 "헤레디움이라는 건물 하나에 담긴 이야기가 내 마음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마르쿠스 뤼페르츠, "Hercules Model 32", 2010.
뤼페르츠는 회화, 조각뿐만 아니라 무대디자인과 시인으로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방위 예술가'인 셈이다. 그는 "나는 그림만큼이나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고, 그래서 비판한다"며 "내가 다른 영역에 도전하는 건 그 영역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담겼다"고 했다.

그는 다른 영역에서의 활동 또한 '회화'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했다. 뤼페르츠는 "시를 쓰거나 음악을 할 때도 '회화를 그리는 예술가'로서 하는 것이다"라며 "내 지성은 모두 회화로부터 이뤄졌고, 나의 사상과 생각들도 모두 회화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했다.작업 인생 내내 '회화의 본질'을 끊임없이 강조한 뤼페르츠. 그에게 '회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듣고 그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한 문장을 읊었다.

"갈망이고, 희망이며, 아직 완벽히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스스로와의 싸움이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