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수백억' 된 철부지 소년...뒤엔 '황금의 스승' 있었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한국경제신문-국립중앙박물관
11월 말 클림트·실레 '블록버스터 전시'

미리 들여다보는 비엔나의 두 천재 화가
그들의 따뜻한 사제관계와 우정
에곤 실레의 '초롱꽃이 있는 자화상'(1912). /레오폴트미술관
아버지는 매독에 걸린 채 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매독균 때문에 두 아이를 뱃속에서 잃은 뒤에야, 아버지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놨습니다.

집안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암울했습니다. 죽음은 계속됐습니다. 누나는 열 살 때 뇌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몇 년 뒤 아버지도 병이 악화되면서 미치광이가 돼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다 결국 죽음을 맞았습니다. 가장을 잃자 집안 형편은 급격히 어려워졌습니다. 생계를 꾸리느라 바빴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민한 감성을 갖고 있었던 소년 에곤 실레(1890~1918)의 마음은, 그 집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실레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 죽음, 성(性)과 죄의식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뒤얽혔습니다.그렇게 방황하던 실레가 비로소 마음 기댈 곳을 찾은 건 열일곱 살 때인 1907년. 당대 유럽 최고의 화가 중 하나였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를 전시회에서 만난 실레가 쭈뼛쭈뼛 다가가 자신의 그림을 내민 게 시작이었습니다. “저기,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에곤 실레라고 합니다. 평소 선생님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실례인 건 알지만 선생님의 드로잉을 제 드로잉과 좀 교환할 수 있을까요? 아, 물론 물론 제 드로잉 여러 점에 선생님 드로잉 한 점을 교환하자는 얘기입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클림트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띠고 찬찬히 소년의 그림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직감했습니다. ‘천재다.’ 클림트는 씩 웃으며 실레에게 말했습니다. “왜 나랑 작품을 교환하자는 건가요? 자네 드로잉이 훨씬 훌륭한데. 작품을 몇 장 교환합시다. 그려둔 게 있으면 말해요. 몇 장 더 내가 살게요.” 그때부터 클림트는 실레의 마음속에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자, 실레의 작품세계가 뻗어나갈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전시 포스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이자 미술 애호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로 첫손에 꼽히는 클림트와 실레. 이 두 사람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비엔나’라는 특별한 곳에서 만나 우정을 쌓았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경제신문과 국립중앙박물관, 레오폴트미술관의 공동주최로 11월 3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은 이런 두 거장을 비롯해 1900년대 비엔나의 예술가들과 문화를 조명하는 블록버스터 전시입니다. 아트페어가 아니라 미술관·박물관에서 에곤 실레의 원화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국내 첫 전시이기도 합니다. 이를 계기 삼아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두 사람의 삶과 예술 세계, 교류를 살펴보겠습니다.

파멸을 품은 화려함, 비엔나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은 뭔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퇴폐적이면서도 성적인 요소가 많고, 같은 시대 인상주의 화가들에 비하면 분위기도 착 가라앉아 있습니다. ‘세기말(世紀末)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화가들이 활동했던 당시 비엔나의 분위기를 알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클림트의 '유디트'. /벨베데레 미술관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600년간 유럽을 호령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지이자, 유럽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오랜 전통과 영광을 간직한 거리에서 잘 차려입은 신사숙녀들은 세련된 예절을 지키며 예술과 철학, 문학을 논했습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한때 유럽 최강이었던 제국은 이제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 다른 열강에 밀려 멸망을 앞둔 ‘지는 해’였습니다. 국가 체제와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속으로 썩어들어 가고 있었고, 상류층은 겉으로만 고상해 보일 뿐 사치와 쾌락에만 몰두했습니다.

당시 비엔나 상류층의 분위기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알던 세상이 곧 무너질 것 같긴 한데, 일단 흥청망청 놀면서 불안한 생각을 잊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는 예술이 꽃을 피우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일단 불안한 사회 분위기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줍니다. 모든 게 잘 풀릴 때보다 우울하고 불안할 때 감성적인 생각이 많아지는 걸 생각하면 쉽습니다. 또 급변하는 사회와 사람들의 혼란은 좋은 작품 소재가 됩니다. 사치와 허세는 예술에 대한 소비와 투자로 이어지고요. 작곡가 바그너와 말러,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클림트와 실레는 그 덕을 본 예술가들이었습니다.
클림트의 '아델 블로흐 바우어 1세의 초상화'. /노이에갤러리
클림트의 '옛 부르크극장의 관객석'. 당시 극장을 자주 찾던 상류층 인물들에 대한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묘사가 돋보인다. /빈 박물관
클림트는 1862년 가난한 귀금속 세공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뛰어난 미술 재능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클림트는 ‘정통 미술 학교’ 대신 상업적인 예술을 가르치는 비엔나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진로 선택’은 멋지게 맞아떨어졌습니다. 당시 제국에서는 화려한 건물들이 마구 지어지던 상황. 건물 내부를 장식하는 벽화를 비롯해 응용 미술에 대한 수요가 넘쳐났습니다. 점차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건 출세작인 ‘옛 부르크극장의 관객석’. 옛날 국립극장 건물의 풍경을 그린 이 작품으로 클림트는 황제에게 황금공로십자훈장과 함께 상금을 받으며 ‘스타 화가’로 날아오릅니다.

성적인 요소를 품고 있지만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고 고상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클림트의 작품은 당시 상류층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느새 클림트는 비엔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얼마 안 돼 클림트는 자신과 같은 신진 예술가들의 집단인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고 당시 미술계를 이끄는 리더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어 자신의 예술세계와 소신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비엔나 대학교의 의뢰를 받아 대강당에 그리게 된 대형 벽화들이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더 화려하게, 더 관능적으로

작품을 의뢰한 비엔나 대학교 측의 의도는 이랬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철학, 법학, 의학의 위대함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을 그려 주시오.” 하지만 클림트가 내놓은 그림은 정반대였습니다.
클림트의 '철학'.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묘사돼 있다. 이 세 그림은 철거됐다가 1945년 나치의 방화로 소실됐다.
일단 ‘철학’. 비엔나 대학교가 상상한 그림은 ‘철학으로 세상의 진리를 드러내는 광경’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방향을 잃고 혼란스럽게 떠도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의학’에서는 병과 노화, 죽음에 대책 없이 시달리는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과 이를 외면하는 건강의 여신을 그렸습니다. ‘법학’을 통해서는 정의가 구현되는 광경은커녕 불안과 고뇌에 빠진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철학, 의학, 법학 모두 운명 앞에서는 모두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겁니다. 당연히 비엔나 대학교 측은 펄쩍 뛰었고, 작품은 철거됐습니다.
클림트의 '의학'.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등의 상징이 눈에 띈다. 왼쪽에 있는 인간의 몸은 무력하게 노출돼 있다. 맨 앞의 건강의 여신은 인간을 외면하는 듯 눈을 감고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클림트의 '법학'.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클림트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인생은 허무한 것이고, 인간이 만든 것들은 운명과 죽음 앞에 무력하다. 그 비극적인 사실을 최대한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의 일이다. 이런 예술은 사람들이 어려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나아가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 이 세상을 더욱 나아지게 만드는 것은 오직 예술 뿐이다’는 게 클림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클림트의 이런 예술관에 따르면 의학과 법학, 철학은 운명을 거역하려는 인간의 의미 없는 발버둥일 뿐이었습니다.

이를 알면 클림트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여성’과 ‘황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적인 요소를 그림에 자주 넣은 것은 생명의 아름다움과 탄생을 표현하기 위해서였고, 황금으로 그림을 장식한 건 작품을 더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클림트의 이상적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속은 방탕했지만 겉은 엄숙했던 위선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는, “클림트가 지나치게 야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좋은 트집거리가 됐습니다. 자신의 사상이 어찌 됐든 의뢰인의 의도와 정반대로 작품을 제작한 건 잘못된 행동이기도 했고요. 클림트를 매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그림값을 환불해준 뒤 공적인 그림을 그리는 걸 그만둡니다. 그리고 ‘나의 평론가들에게’(나중에 ‘금붕어’로 제목을 변경)라는 제목의 그림을 발표합니다. 뜻은 이랬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처럼 바보같은 녀석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련다. 똥이나 먹어라.”
클림트의 '금붕어'. 원제는 '나의 평론가들에게' 였다. 아래쪽 엉덩이를 드러낸 물의 요정의 모습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클림트는 이 사건 이후에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클림트 그림은 너무 저질 아니냐”며 비판을 쏟아내던 사람들도 뒤로는 클림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해 줄을 섰기 때문에, 클림트는 갈수록 부유해졌습니다. 이런 클림트의 모습은 예술가들의 우상이었습니다. 혁신적인 작품을 발표한 뛰어난 실력의 천재 화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뚝심 있게 자신의 작업을 이어가며 부와 명성을 다 잡은 화가로 보였으니까요. 이런 클림트의 모습을 동경하는 사람 중 하나가 에곤 실레였습니다.

클림트를 만난 어린 천재

어린 나이부터 완성에 가까운 기량을 선보이는 천재 예술가는 많습니다. 신동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가 음악입니다. 모차르트가 유럽 순회공연(연주 여행)을 시작한 게 6살 때였으니까요. 문학에도 이런 사례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시인 랭보는 19살 때 주요 작품의 대부분을 완성했습니다. 영국 작가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기 시작한 나이도 18살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술은 이런 사례가 드문 편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신동이었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작품 세계를 꽃피우는 건 중장년인 경우가 많습니다. ‘번뜩이는 천재성과 창의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표현하기 위한 그림 기술을 습득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에곤 실레가 15살때 그린 그림. 미술을 제대로 배우기 전에 취미 삼아 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드문 예외 사례가 실레였습니다. 실레는 클림트가 스물여덟살이 되던 1890년 철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고, 분위기도 좋지 않았습니다. 매독에 걸려 정신 질환에 시달리다 죽은 아버지 탓이었습니다. 실레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학업 성적도 형편없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미술 과목에서만큼은 제대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덕분에 실레는 성인도 입학이 힘든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미술은 실레에게 지루할 뿐이었습니다. “네가 그리는 그림은 그림도 아니다. 기본기나 더 닦아.” 심지어 교수들은 실레의 재능을 무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존심 강한 실레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전시회에서 클림트와 동료들의 작품들을 접하고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지루한 예술 대신 나는 나만의 예술을 해서 클림트처럼 성공한 멋진 화가가 될 거야.’ 전시장에 나와 있던 클림트에게 실레가 용기를 내 다가간 것도, ‘클림트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에서였습니다.
에곤 실레의 '은둔자들'(1912). 뒤에 있는 사람은 클림트를, 앞은 작가 자신을 의미한다. /레오폴트 미술관
클림트는 이 젊은 화가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유망주가 자신을 존경한다며 다가왔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실레의 불안과 고민에 깊이 공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클림트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몇몇 증언에 따르면 클림트의 어머니도 실레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정신 질환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실레에게는 미술 역사에서도 손꼽을 만큼 희귀한 종류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클림트는 이 재능을 잘 키워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재능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실레의 예술적 재능은 이미 성숙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신은 평균적인 자기 나이 또래 수준이었습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중2병’과 비슷한 사춘기 상태라고 표현해도 될 듯합니다. 그가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 남긴 기록과 행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은 후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고 내 예술에 감탄할 것이다” “나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와 같은 말들이 일기와 편지에 수없이 등장하니까요.
에곤 실레의 '자화상'(1915). /레오폴트 미술관
에곤 실레의 '어머니의 죽음 1'(1910). 실레는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항상 아쉬운 소리를 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담은 이같은 작품을 많이 그렸다. /레오폴트 미술관
실레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충동을 품고 있으면서도 인생 경험이 부족해 여러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 전형적인 사춘기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멋 부리기 좋아했고, 잡다한 물건에 호기심을 느껴서 마구 사버렸고, 여행을 좋아하고, 잘난 척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다정한 말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형편에도 자신을 힘껏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고, 사회 통념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다 사고를 치기도 했고,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연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자아에 도취해 있다가도 자기 혐오에 빠졌고,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세상에서 내가 가장 괴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실레 작품의 매력이 나옵니다. 다른 위대한 작가들은 오랫동안 쌓아 올린 기술로 지난 세월 성숙한 작품 세계와 정신을 표현했습니다. 실레도 예술적인 기량은 그들 못지않았습니다. 하지만 실레의 정신은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실레는, 자신이 직접 겪고 있는 청소년기 후반과 성인기 초반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다른 어떤 위대한 화가보다도 깊이 들여다보고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미술사에서 영원히 남을 ‘청춘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청춘을 지나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그 이후에는 젊은 시절의 혼돈과 에너지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가 된 거지요.
에곤 실레가 스물네 살이던 1914년 찍은 사진.

너무 일찍 간 천재

이런 실레를 클림트는 살뜰히 돌봐줬습니다. 그룹 전시회에 작품을 걸 기회를 주고, 경제적으로 힘들 때는 임시로 취직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알아봐 주기도 했습니다. 실레도 클림트를 스승으로 모시며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클림트의 작품 구도를 따라 하기도 하고, 여러 기법을 배우며 그의 작품세계는 급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실레는 1910년을 전후해 자신만의 화풍을 찾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그는 특유의 매력이 넘치는 강렬한 그림들을 연달아 그려냈습니다. 이런 화풍은 자신의 우상이었던 클림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레의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감정 표현에서 영향을 받은 클림트가, 감정 표현이 어려운 금색 사용을 줄이고 다른 다양한 색채와 문양을 통해 그림을 장식하기 시작한 겁니다.
에곤 실레의 '프레데리케 마리아 베어의 초상'(1914). 인물 표현이나 모델의 옷에서 클림트의 영향이 느껴진다.
클림트의 '프레데리케 마리아 베어의 초상'(1916). 클림트가 다시 에곤 실레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1910년대 중반이 되자 실레가 오스트리아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었지만, 그의 작품이 당시 시대 분위기에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클림트의 그림에도 덧없는 허무함이 담겨있긴 하지만, 실레의 황량한 그림에 비교하면 낙천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이 있습니다. 반면 실레의 그림은 코앞으로 다가온 파국에 대한 강렬한 예감을 품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1918년 전쟁에서 패배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조각조각 찢어지고 마니까요.

1918년 2월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클림트의 예술적 후계자이자 오스트리아 예술가의 리더로 인정받게 됩니다. 어느새 실레는 인격적으로도 성숙하며 미술계 사람들과도 잘 지내게 됐습니다. 20대 중후반에 접어든 데다 결혼을 하고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입대해 군 생활을 하는 등 여러 경험을 쌓은 덕분이었습니다.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1915). 오랜 연인과의 이별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벨베데레 미술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해 10월 실레는 전염병(스페인 독감)에 걸려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실레의 재능이 새로운 시대와 국면에서 또 어떤 작품을 만들어냈을지 상상해 본다면 실로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1900년대 비엔나를 들여다보다

허무하고 아쉽게 끝나긴 했지만, 클림트와 실레의 만남은 미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클림트가 없었다면 실레의 예술은 존재하지 못했거나, 최소한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겁니다. 반면 실레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클림트도 말년에 새로운 작품 세계의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클림트의 성숙함과 관대함, 실레의 강렬한 열정과 순수함이 서로 만난 덕분입니다.

클림트의 황금빛 장식 속에 숨겨진 허무와 실레의 날카로운 선 속에 담긴 젊은 날의 혼란. 두 거장의 작품은 각각 따로 놓고 봐도 강렬한 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사제 관계와 같은 화가들 간의 관계, 비엔나의 사회상 등을 알고 나면 작품은 우리에게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클림트의 '다나에'.
에곤 실레의 '무릎을 굽힌 채 앉아있는 여성'(1917). /프라하 국립미술관
오는 11월 30일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이 예매가 열리기도 전부터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최고의 실레 컬렉션이 있는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작품을 대거 빌려온 클림트·실레 원화 전입니다. 전시는 두 사람을 비롯해 당대 비엔나에서 활동한 천재 예술가들의 작품세계와 그들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전시장에서는 레오폴트 미술관의 소장품 총 190여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클림트의 ‘초롱꽃이 있는 자화상’이나 전시 포스터에 있는 클림트의 ‘수풀 속 여인’ 등을 주목할 만합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를 비롯해 클림트가 주도한 비엔나 분리파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비엔나 예술계의 전반적인 흐름과 클림트, 실레의 위치를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전시 관련 소식을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행복한 명절 보내세요.
에곤 실레가 그린 클림트의 초상(1913).
**이번 기사는 에곤 실레(라인하르트 슈타이너 지음, 양영란 옮김), 클림트(질 네레 지음, 최재혁 옮김), Egon Schiele: Love And Death(Jane Kallir 등 지음, 알베르티나 미술관 펴냄), 클림트-에로티시즘의 횃불로 밝힌 시대정신(이주헌 지음), 에곤 실레 - 불안과 매혹의 나르시시스트(장루이 가유맹 지음, 박은영 옮김), Gustav Klimt - Modernism in the making (Colin B. Bailey 등 지음), Egon Schiele : the Leopold collection, Vienna(Magdalena Dabrowski, Rudolf Leopold 지음, 뉴욕 MoMA 펴냄), Gustav Klimt and Egon Schiele(구겐하임미술관 펴냄), Erwin Mitsch : Egon Schiele(Erwin Mitsch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독자 여러분의 사랑 덕분에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이 10쇄를 돌파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전시 개막 시기에 맞춰 속편 성격의 다음 책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다음 책에는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삶과 작품세계를 각각 따로 다룬, 더 깊고 자세한 이야기도 실릴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