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통한 참새가 새풀 위에 사뿐히… 가을을 여는 이도영의 '화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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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국신사 유람일기징글징글한 역대급 더위도 조금씩 고개를 수그리고 날카롭던 모기 입도 비뚤어지는 처서(2024년 8월 22일)가 지난 지도 한참이다. 이제 귀똘이들도 귀똘귀똘 소리내기 시작하니 바야흐로 가을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리라. 옛 선비들은 처서가 되면 여름 장마에 습기를 머금은 책을 하나 둘 꺼내 볕에 말리면서 서가를 점검하고 목록을 확인하는 포쇄[曝曬]를 통해 귀하디귀한 마음의 양식을 돌보았다. 오랜만에 선비 놀이 겸 구석에 넣어뒀던 옛 그림들을 꺼내 살피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끼는 한국화 한 점이 올해로, 심지어 그날로 딱 백 살이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가을 분위기를 자아내는
관재 이도영의
예술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높아졌지만
상대적으로 열외에 있는 한국화
우리 옛 그림을 즐기는 법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를 찾는 것


시를 읊고 글도 쓰며 그림까지 그리던 과묵한 선비들도 실상은 귀여운 구석들이 조금씩 있었을 터... 문인화를 그리던 선비 중에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나라 안팎의 복잡다단한 문제들 말고 우리 주변의 깨알 같은 일상과 작은 새, 그리고 화초의 변화에 애정과 관심을 쏟던 분들도 계셨을 테다. 그런 분들의 덜 심각하고, 덜 중요한, 그러나 바라보면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는 그런 한국화를 찾아왔다. 이런 그림들이야말로 친구들과 위스키 한잔 기울이며 안주 삼기도 좋을뿐더러 방향성 있는 컬렉션을 하던 부모(?)로 기억되는 특별함도 남길 수 있겠다 싶었다. 특히 그림을 펼쳐 놓고 어린 딸과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몫하였다.
아차차 우선 이 그림이 어떠한 연유로 딱 백 살이 되었는지를 먼저 밝히고 찬찬히 뜯어보는 게 좋겠다. 관재 선생께서 손수 쓰시고 낙관을 찍어둔 내용을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가까운 형님께 문의하였다. ‘갑자하서전일관재자(甲子夏暑前日貫齋字)’, ‘갑자년 여름(夏) 처서(處暑) 전 날(前日) 관재(貫齋)가 쓰다’.
무식한 놈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안도현
여하튼 이렇게 그림을 보다가 안도현의 시가 떠올랐고 이 그림이 그려질 때 관재 선생은 어떤 꽃을 묘사했을지 궁금해졌다. 구절초의 개화 시기는 조금 더 서늘해진 후라 늦여름 개화하는 쑥부쟁이일 가능성이 높겠다고 생각했지만 꽃도 이파리도 조금 큰걸 보니, 상대적으로 꽃이 작고 귀여운 외래종 미국쑥부쟁이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 전쟁 때 미군을 따라 들어온 귀화 식물일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그도 아닌가 싶어 식물도감을 한참 뒤져 본다. 그 해 유난히 정말 국화가 일찍 꽃을 피운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 보고, 뜻 밖에 고들빼기가 만개했을 때 비슷한 느낌인 듯도 하여 오랜만에 즐겁게 식물 유람도 해본다.
무엇보다 우리땅 한복판에서 열리는 미술 축제에 우리 그림들이 한중간은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또렷하게 자기 자리를 차지해 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을, 백 살 된 그림을 펼쳐놓고 주절거려 본다. 추사의 <세한도>나 교과서에서 본 저명한 작가의 그림이 아니라도 이런 추억과 이야기를 담은 조상들의 그림 한 점 살피며 희희낙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곧 구절초가 만개할 테니 몇 송이 꺾어다 꽂아두고 참새를 한 번 불러볼까 한다. 혹시 참새가 알려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