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내 마음속 답 빼고는 전부 오답'이란 금융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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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선 자율 강조하고 결과엔 '태클'“판단은 기업이 자율적으로 하라고 해놓고선 정작 기업이 결정하면 ‘그건 틀렸어’라는 식이에요.”
기업들, 눈치보느라 혼선만 가중
선한결 증권부 기자
최근 금융·회계업계 관계자들이 금융당국을 두고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당국이 지침을 강요하기 어려운 사안까지 답을 정해놓고, 기업이 이를 맞추지 못할 경우 발목을 쥐어 잡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는 한탄이다.가장 가까운 예는 은행이다. 최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집값 상승기에 은행이 가계부채 관리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대출 규제 조치를 내놓자 이번엔 실수요자 피해를 지적했다. 이 원장이 ‘오락가락’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은행권의 자율적 관리를 강조했지만 실무자들의 혼란은 여전하다. 당국 수장이 원하는 목적지를 밝힌 이상 장단을 맞추지 않을 수 없어서다. 세부 내용은 은행이 알아서 잘 내놔야 하는 부담만 생겼다.
기업 간 인수합병(M&A) 시 몸값 산정 문제도 그렇다. 금융위원회는 올초 M&A 제도 개선 과정에서 대기업 계열사 간 합병 때 시가 기준을 유지하기로 했다. 기업가치를 자율 산정하면 대주주 위주로 의사결정이 이뤄져 일반 주주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요즘 금융당국은 ‘시가는 오답’이라며 입장이 180도 바뀐 모양새다.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 시도 이후부터다. 두산이 시가 기준으로 계열사 기업가치를 산정하자 이 원장은 “시가가 공정 가치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며 막아섰다. 지난 12일엔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대기업 계열사 간 M&A에 대해 시가 기준을 폐기할지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올초와는 정반대 방침이지만 또 ‘일반 주주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논리를 들었다. M&A 시나리오를 짜야 하는 기업은 한동안 당국의 입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됐다. M&A 가격을 어떻게 산정하든 정부의 ‘창구 지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기업들의 우려다.기업의 회계처리를 두고도 비슷한 분위기다. 한국이 전면 도입해 쓰고 있는 국제회계기준(IFRS)은 기업의 자율적 회계 처리를 중시하는 게 원칙이다. 기업 자신이 그 기업의 경제적 실질을 가장 잘 안다는 철학에 근거한다. 하지만 최근 금융당국은 각사가 이 같은 원칙하에 각기 달리 써온 보험·플랫폼 회계처리 방식에 대해 일괄 규제 혹은 징계를 논의하고 있다.
기업들은 정부가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그렇게만 대답해) 식으로 제도를 운용한다고 토로한다. 한 기업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속마음을 알아서 맞춰주지 않으면 사후 ‘태클’을 피할 수 없는 분위기”라며 “눈치를 보느라 의사결정이 늦어지는 등 비효율이 쌓이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