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설레게 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디스토피아적 공간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영화제에서 주목해야 할 감독 : 구로사와 기요시
특별전으로 초대된 미겔 고메스와 함께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주목할 감독은 바로 구로사와 기요시다. 아마도 일본 공포영화 중 가장 정교하고 영리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의 대표작 <큐어>는 영화가 정식 출시되지 않았던 한국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즉각적으로 팬층을 형성했다. 그는 2016년 <은판 위의 여인>이라는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바 있다.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 MANUEL MOUTIER - J1 / 출처. 한경DB
올해 영화제에서는 기요시의 영화가 두 편이나 상영된다. <뱀의 길>은 올해 산 세바스찬 국제영화제의 경쟁 섹션에 초대되었던 작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기요시 본인이 1998년에 연출했던 동명의 작품 <뱀의 길>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파리의 교외를 배경으로 하는 이번 리메이크는 장기매매 단체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 어린 딸의 복수를 하는 프랑스인 기자 알베르의 이야기를 그린다.기요시는 스크린 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뱀의 길>의 리메이크를 선택했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배태된 순간으로 프랑스 프로덕션인 시네프랑스 스튜디오와의 만남을 언급했다. 소속 프로듀서들이 기요시에게 본인의 작품을 프랑스에서 리메이크한다면 어떤 작품을 하고 싶냐고 물었고 기요시는 즉각적으로 <뱀의 길>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기요시는 또한 “(당시에는)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확고한 비전이나 방법론이 있지는 않았지만 알프레드 히치콕이 자신의 영화를 몇 차례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이 내게 용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탄생한 작품인 만큼 <뱀의 길>에는 많은 변화와 변주가 눈에 띈다. 가장 큰 변화는 야쿠자였던 원작의 (주인공) 캐릭터가 리메이크에서는 기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극도로 어둡고 침울했던 배경과 공간이 특징이었던 전작이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리메이크에서 어떻게 재현될지 역시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lt;뱀의 길&gt; 스틸컷 © 2024 CINÉFRANCE STUDIOS - KADOKAWA CORPORATION - TARANTULA /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기요시의 또 다른 상영작 <클라우드>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비경쟁 섹션에서 상영되었다. 이야기는 작은 공장에서 일하는 ‘요시이(스다 마사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라텔’이란 가명의 전문 리셀러로 활동한다. 의료 기기부터 핸드백, 피규어까지 취급하는 그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요시이는 승진을 제안 받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고 공장을 그만둔다. 그는 곧 도시 외곽의 호숫가 집을 구해 여자친구 아키코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지역 청년 사노의 도움으로 리세일 사업 계획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주변에서 불안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기 시작한다.영화의 프로덕션 노트에서 기요시 감독은 영화를 구상하는 데 있어 현대 일본 사회에서 종종 발생하는 ‘이유 없는 폭력’에 주목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들의 원인을 조사해보면 사소한 원한과 불만이 쌓이고 인터넷에 의해 분출되는 일종의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요시는 이러한 현상이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 프로젝트를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앞서 언급한 <뱀의 길>과 마찬가지로 <클라우드>에서 역시 ‘복수’는 중요한 이야기적 모티프로 등장한다. 원한과 복수가 끊임없이 중첩되고 증폭되면서 폭력의 실행이 시작되고, 주인공은 어느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캐릭터의 운명에 대해 기요시는 ‘이러한 폭력의 순환이 현대 전쟁의 시작일 수도 있다’고 언급한다.
&lt;클라우드&gt; 스틸컷 © 2024 &quot;CLOUD&quot; FILM PARTNERS /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궁극적으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기요시의 <뱀의 길>과 <클라우드>는 그의 작품세계를 두 편의 영화로 함축한 듯 그의 작가주의적 성향과 테크닉, 스타일과 비전이 응집된 작품들이다. 특히 두 편의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기요시가 재현하는 디스토피아적인 공간이다. <뱀의 길>에서 등장했던 공장, 뒷골목 등의 도시의 어두운 심연이 프랑스의 교외에서는 어떻게 펼쳐질지, <클라우드>의 요시이가 머물렀던 속세의 공장, 그리고 그를 ‘폭력의 세계’로 연계하는 도시 외곽의 집 등의 묘사는 분명 이번 기요시의 작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이 아닐 수 없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마스터 클래스와 갈라 프레젠테이션으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