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빙하기에도 살아남은 공룡, 정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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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지난 20여년 동안 개봉했던 거의 모든 한국 상업영화에 등장했던 배우가 있다. 바로 한국 영화의 혹한기라고 하는 올해만도 3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정만식 배우다. 정만식 배우는 2001년에 데뷔한 이래로 총 56편의 영화, 그리고 29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이쯤 되면 그에게 현시대의 신성일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 영화 혹한기에 더 빛나는 배우 정만식
영화 '아수라', '내부자들' '베테랑2' 까지
물론 그가 다작'만' 하는 배우는 아니다. <아수라>는 ‘도창학’이 없었다면, <내부자들> 역시 '최충식'이 없었다면 절대 전설이 되지 못했을 작품들이다. 현재 흥행몰이 중인 <베테랑2>에서도 전편 전사장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 정만식 배우를 만나 그가 바라보는 한국 영화, 그리고 그 안에서의 그의 자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커리어의 시간에 비해, 해 온 작품 수에 비해, 인터뷰를 많이 하진 않은 것 같다. 혹시 인터뷰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아닌가.
"피하는 것도 없지는 않다.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웃음). 내 업적이 인터뷰를 할 만한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나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았기에 인터뷰가 그렇게 내키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왜 날 인터뷰하는지 잘 모르겠다(웃음)."
▷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꿈꿨나?
"고등학교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다니던 교회에서 연극을 했는데, 작은누나가 그걸 보고는 나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했다. 작은누나가 배우 정만식을 만든 셈이다. 누나의 권유로 서울예대의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고 목포를 떠나 수원에서 작은 연극을 하고 있을 때 연기학원을 보낸 것도 누나였다."
▷ 올해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지 24년이 된다. 26세에 드라마로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것인가?
"그렇다. 스무 살 때부터 연극을 하다가 군대를 갔다. 다시 돌아와서는 아는 형과 극단에 같이 지원했는데 형은 떨어지고 나만 붙었다. 그 극단(백수광부)에서 공연을 하는데 친구였던 양익준 감독과 조감독으로 일하던 분이 내 공연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조감독님이 내 연기를 보고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에 <잠복근무>라는 상업영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영화가 인디스토리가 배급한 독립영화, <총냄새> (2001) 라는 40분짜리 중편이다. 작품에 대한 정보가 없어 궁금하다.
"2001년에 '레스페스트'라고 해서 디지털 영화제가 있었다. 그때 이 영화가 운 좋게도 폐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당시는 정식 데뷔 전이고 내가 스크린에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아마 6개월 동안 서른 편이 넘는 단편 작업을 했던 것 같다. 씨네 21이나 필름 2.0 구인이 뜨는 것은 모두 다 지원했다."
▷ 이후 첫 상업영화, <잠복근무>까지 몇 년 정도의 공백이 있었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그때가 일종의 방황기라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돈을 벌어보고 싶었다. 그때 다양한 종류의 일을 했다. 고깃집에서 일도 해보고 방향제도 팔아보고 여러 가지 종류의 일을 했는데 꽤 잘했다 (웃음). 카드를 안 썼던 시기라 현금을 가지고 다녔는데 비상금으로 백만원 정도를 가지고 다녔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웃음). 다만 어느 순간 돈을 그만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연기에 몰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막상 (연기에 대한) 간절함을 좀 내려놓았던 그때 선물처럼 영화 프로젝트가 내게 떨어진 것이다. 특히 <잠복근무> 이후에 했던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로 많은 감독님이 컨택을 해왔다."▷ 2010년, <원 나잇 스탠드>라는 작품으로 첫 주연을 맡았다. 당시 기준으로는 신인 감독들 (민용근, 장훈, 이유림) 들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이면서도 나름 수위가 높은 영화다. 어떻게 참여한 영화인가?
"이유림 감독이 영화 <파주>의 스크립터였다. 내가 <파주>에 출연했을 때 나중에 장편을 하면 함께 해달라고 이야기했었고, 그게 결국 이 옴니버스 프로젝트로 현실화된 것이다. 사실 시나리오 읽고 갈등을 했지만 결국 맡았다. 막상 말하려니까 지금도 매우 쑥스럽다. 그때도 그랬던 것 같다. 느낌과 상황을 주연으로 끌어간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 자체의 색다름(에로틱한 장면이나 멜로적인 감성) 등의 부담이 적지 않았다. 지금 만약 다시 멜로를 하라면 그때처럼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웃음)."▷ 주로 악역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악당이라기보다 선과 악이 묘하게 뒤섞인 양가적인 인물이 많다. 예를 들어 <아수라>에서 맡은 도창학은 극악무도하지만 엄연히 법, 정의의 편에 선 인물이 아닌가. <내부자들>의 최충식도 그런 맥락에서는 비슷한 인물이다. 이러한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김성수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질문을 던졌다. 도창학 같은 경우 도사견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시키는 대로 모조리 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하진 않았다.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닌 도사견 같은 인물, 혹은 생계형 악인이랄까? 고통스럽기는 하나 생존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물 말이다."
▷ <아수라>는 배우 정만식에게, 그리고 한국 영화에 있어서도 매우 독보적인 작품이다.
"매우 그렇다. 일단 시나리오 원래 제목이 <반성>이었다 (일동 웃음). 그걸 보고 황정민 선배가 아무도 반성을 안 하는데 무슨 반성이냐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정민 선배의 권유로 <아수라>로 제목이 교체되었다. 결말도 원래는 나만 살아남는 설정이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모두 악인이 된 거) 그냥 다 쓸어버리자는 신조가 결국 그 ‘징글징글한 엔딩’으로 바뀌게 했다(웃음)."▷ 이번 인터뷰를 위해 정만식 배우의 영화를 다시 찾아봤는데 (편수가 많아 정말 힘들었다) 그 중 <사선의 끝> (2019) 이라는 작품은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영화적인 만듦새는 투박하지만, 불법체류자들의 인권을 다루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출입국 관리소의 팀장 캐릭터(정만식 배우가 맡은 역)도 흥미롭고, 주목할 만하다.
"일단 처음에는 장편의 주연이라는 부담 때문에 고사했던 영화다. 여러 가지 여건이 안 좋았던 영화이고 개봉을 하는 데 6년이나 걸렸다. 캐릭터 자체가 말이 별로 없고, 개인사를 입 밖으로 절대 내지 않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한국의 중년 남자인데, 그간 내가 했던 역할과 많이 달랐다."▷ 사나이 픽처스 (한재덕 대표)의 ‘사나이’로도 활약 중이다 (웃음). ‘사나이’로 활약하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한재덕 대표와 친하면 된다 (웃음). 농담이고, 정말 감사한 일이다.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 오면 일단 보내주신다. 읽어보고 혹시 맞는 역할이 있는지 찾아보라는 식이다 (웃음). 내게 애정이 없거나 내 연기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늘 고맙게 생각한다. 내 연기 인생에서 사나이 픽쳐스는 대단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거의 사나이 픽쳐스 직원이라고 보면 된다 (웃음)."
▷ 지금처럼 한국 영화가 귀한 시기에 8, 9월에만 본인의 출연 작품이 세 편이나 공개되었다. <리볼버> (오승욱), <크로스> (이명훈), 곧 개봉을 앞둔 <베테랑2> (류승완) 가 그것이다. 기분이 어떠한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다. 늘 작업을 해왔고, 늘 동시에 몇 개를 해왔기 때문에 작품이 동시에 몇 개가 나온다고 해서 그게 남다르거나 색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항상 감사하다는 마음은 갖고 산다. 요새 같은 (한국 영화 제작이 줄어든 요즘 같은) 시기에는 특히나 더 감사하다는 생각뿐이다."
▷ 현재 하고 있는 작품은?
"JTBC 드라마와 디즈니 플러스의 <넉 오프>라는 드라마 시리즈를 하고 있고 촬영을 마친 <야행>이라는 영화는 아직 공개 전이다. 빨리 관객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의 끝자락에서 정만식 배우는 “난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의 그 ‘선언’이 인터뷰가 끝난 이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맴도는 이유는 과연 그의 행적이 현재 그가 행복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정직하고도 치열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2시간여의 인터뷰 동안 나눈 이야기들은 대부분 배우 정만식의 영화들이었지만 그의 이러한 지난하고도 열정 가득한 여정은 ‘나’의 인생 또한 돌아보게 한다. 그의 ‘행복한 인생’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