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사연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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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의 등단작 ‘산문(山門)에 기대어’는 휴지통에서 건져 올린 시입니다. 원고지가 아닌 갱지에 써서 ‘문학사상’ 신인상에 응모했다가 휴지통으로 들어가 버린 것을 이어령 씨가 극적으로 발견했지요. 응모작에는 여관 주소만 적혀 있어 그를 수소문하느라 1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전남 고흥 태생으로 순천사범학교와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서른 중반까지 문학 열병을 앓았습니다. 20대 초반 섬으로 발령을 자청해 중학교 교사로 6년을 지냈고, 몇 년 뒤 다시 섬으로 발령이 나자 아내와 3남매를 두고 여기저기 떠돌았습니다. 어느 날 서점에서 ‘문학사상’을 보고, 여관에 틀어박혀 갱지에 응모작을 써서 투고한 뒤 낙향해 농사를 짓다가 1년 만에 당선 소식을 들었지요. 그때가 1975년, 서른다섯 살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시에 등장하는 ‘누이’는 여동생이 아니라 자살한 남동생입니다. 엿장수를 하며 그의 대학 등록금을 대 주던 착한 동생.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둘은 계모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군에서 제대한 다음 날 친모의 무덤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무덤 주변에는 동생이 먹다 만 알약들이 이슬에 반짝였습니다. 이 시는 세상을 비관해 일찍 생을 마감한 아우를 향한 현대판 제망매가(祭亡妹歌)인 셈이지요. 첫 구절을 ‘아우야’가 아니라 ‘누이야’로 시작한 게 절묘했습니다. 죽은 동생의 눈썹이 가을산 그림자에 빠지고, 기러기가 그 눈썹을 물고 날아다니는 풍경이라니!

시인은 생전에 “눈썹이나 머리카락 같은 것은 매장해도 오래 썩지 않고 남아 그 사람의 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라는 구절이 더욱 애절합니다. 빈 잔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제의(祭儀)의 과정은 또 어떤가요. 시 제목의 ‘산문(山門)’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비의적 아름다움과 남도의 가락을 절묘하게 버무려 낸 덕분에 그는 석사학위도 박사학위도 없는 ‘국립대 교수 1호’로 초빙돼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됐지요. 그곳에서 오랫동안 후학을 가르치다 2016년 4월 ‘산문’ 넘어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아름답고도 애달픈 그의 다른 시 ‘석남꽃 꺾어’를 함께 읽으며 투박한 듯 해맑은 생전의 모습을 다시 그려봅니다.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들고
밤이슬 풀비린내 옷자락 적시어가며
네 집에 들리라.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