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살 BIFF, ‘아홉 수’ 위기에서 기회를 엿본다

제 29회 부산국제영화제 다음달 2일~11일 개최
박찬욱 참여 OTT영화 ‘전,란’ 개막작으로 선정
관객과의 거리 좁히려는 새로운 시도
구로사와 기요시, 미겔 고메스 등 거장들 작품 소개
2001년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 /BIFF 제공
서른 살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나이다. 시대를 읽을 땐 ‘한 세대(世)’를 구분하는 쉼표가 되고, 개인의 삶을 짚을 땐 소년이란 껍질을 탈피해 청년으로 우화하는 분기점이 된다. 어떤 조직이나 행사가 서른 해를 맞이했다면 이때부턴 역사가 쓰인다. 서른 살이 되면 ‘마음이 확고하게 선다’는 의미로 ‘이립(而立)’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여주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서른 즈음’에 있는 스물아홉 살은 조금 얄궂다. ‘완생(完生)’으로 향하는 ‘미생(未生)’의 마지막 단계에 놓인 시점이니 말이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치이고, 불안이 가득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지금 부산 바닷가와 좌충우돌 부대껴온 어떤 스물아홉의 모습이 딱 그렇다. 오래전 가능성을 보여줬고, 뜨겁게 타오르기도 했다가 넘어져 다치는 아픔도 겪었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 영화제이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인의 축제,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BIFF) 이야기다.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해운대 야외상영장. /BIFF 제공
한국 영화 자존심, ‘영화의 바다’ BIFF

지난 5월 제77회 칸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영화 청년, 동호>가 기립박수를 받았다. 명작이나 거장 영화인을 조명하는 ‘칸 클래식’ 섹션에 초청된 이 영화는 BIFF를 창설하고 15년간 집행위원장을 맡은 김동호 전 BIFF 이사장의 영화적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비엔날레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1994년 전 세계 미술인을 모아 예술의 싹을 심은 광주비엔날레처럼, 영화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에 1996년 영화인들과 연대해 부산에 터를 잡고 BIFF를 개최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문화 세계화가 이뤄지기 전인 1990년대 한국은 그야말로 영화제의 불모지였다. 서울에서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던 게 영화제였으니, 부산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부산에서 무슨 영화제냐”라는 말은 그 시절 당연한 상식처럼 여겨졌다. 해운대 모래사장처럼, 영화제를 개최할 만한 특별한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부산은 개항 이후 극장들이 성행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식 영화 제작사가 탄생한 영상 문화 소비도시로 영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진 건 없어도, 만들어보자’는 영화인의 의지는 부산다운 정신을 잘 보여주었다.그렇게 우려 섞인 시선 속에 국제영화제가 첫걸음을 내디뎠다. 당시만 해도 PIFF(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라는 이름표를 달았던 BIFF는 우려와 달리 시작부터 ‘대박’을 쳤다. 자금 조달하는 데 애를 먹고, 초청작 필름이 도착하지 않아 상영이 취소되는 등 난맥상이 드러났지만, 첫 회에 31개국 167편의 작품을 소개한 영화제는 무려 18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수영만에 들어선 거대한 야외 스크린에서 개막작인 <비밀과 거짓말>(1996) 등 작품들이 상영되는 모습은 낭만의 도시 부산과 자유로운 영화제 BIFF의 정체성이 됐다.
1998년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PIFF 광장의 모습. /BIFF 제공
영화인과 나이 지긋한 시네필(cinephile, 영화 애호가)들은 자유롭고 낭만적인 BIFF의 모습으로 남포동과 해운대 바닷가를 기억한다. 부산극장, 대영시네마 등 영화제 작품들이 상영되던 남포동 극장 앞 길바닥에 신문지 깔고 ‘스트리트 파티’를 벌이고, 해운대 포장마차촌에서 저명한 해외 영화계 인사와 배우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광경은 다른 국내외 영화제들이 따라올 수 없는 BIFF만의 ‘맛’이 됐다. 2015년 영화 <세 도시 이야기>를 들고 BIFF를 찾은 메이블 청 감독이 “해산물이 신선하다더라”며 포장마차를 방문하고 싶다고 밝히고, 함께 온 배우 탕웨이가 “부산에 올 때마다 포장마차에 간다”고 밝힌 게 단적인 예다.

도쿄 국제영화제, 홍콩 국제영화제와 함께 아시아 최대 영화제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성장통이 없던 건 아니다. 추석 명절을 피하느라 개최 시기를 조정하다가 다른 국제영화제와 겹치기도 하고, 태풍 같은 날씨의 심술로 고생하기도 했다. 2016년 세월호를 다룬 영화 <다이빙벨> 상영을 두고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가장 큰 아픔은 지난해 열린 제28회 영화제다. 인사 논란에 성 비위 문제까지 겹치며 이사장과 집행위원장이 중도 사퇴하면서 영화계 인사부터 관객까지 손님들을 맞이해야 할 영화제 어른들이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이다. 결국 배우 송강호가 호스트로 나서 수습에 나섰지만, 위기 속에서 허우적대고 어지러운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BIFF에서 목격했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BIFF의 존재 가치와 지속 가능성에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인도 있었다.
배우 송강호(왼쪽)와 주윤발(오른쪽), 부인 진회련이 지난해 부산 우동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28th BIFF)'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경DB
스물아홉 BIFF의 새로운 도전

그럼에도 BIFF는 한국 영화의 자존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에 구애 없이 다양한 영화를 선보이고, 글로벌 영화계의 흐름은 물론 한국 영화 시장의 현주소까지 짚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다. 특히 ‘흥행 양극화’, ‘투자 쏠림’ 등 코로나19 이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영화 생태계 회복이 필요한 시점에선 숨은 보석 같은 작품을 관객에게 알려온 BIFF의 존재감이 더욱 크다. 영화인과 시민들이 격의 없이 이야기 나누고 친해질 수 있는 장(場)이란 점에서도 그렇다.이런 점에서 지난해 겪은 내홍을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은 BIFF가 올해 새로운 시도에 나선다. 10월 2일부터 11일까지 열흘 동안 영화의전당 등 부산 7개 극장에서 열리는 BIFF는 올해 63개국 영화 224편을 공식 초청하기로 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15편 늘어난 규모로 관객 참여형 행사인 ‘커뮤니티비프’까지 합치면 총 279편이 관객과 만나는 셈인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영화제 포문을 열 개막작이다.

올해 영화제 개막작은 <전,란>이다. 거장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하고, <공동경비구역 JSA>로 대종상 미술상을 받은 김상만 감독이 연출한 사극이다. 흥미로운 점은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에 공개될 OTT 작품이라는 사실.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 30주년을 앞두고 처음으로 개막작을 OTT 영화에 내준 것이다. 유수의 영화제가 최근 들어 OTT 작품의 초청 비중을 높이고 있긴 하지만, 극장에 걸리지 않는 작품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별개의 문제다. 봉준호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옥자>가 초청되자, 칸영화제 내부에서 상을 줘선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온 게 고작 7년 전 일이다.
1998년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 풍경. /BIFF 제공
BIFF는 관객과 함께하는 영화제라는 정체성을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 OTT 영화를 영화제의 얼굴 격인 개막작에 낙점했다고 설명한다. 박도신 BIFF 집행위원장 직무 대행은 “<전,란>은 역대 개막작 중에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남동철 수석 프로그래머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박찬욱 감독이 직접 참여하고 영화인들이 힘 모아 완성한 매력적인 사극”이라고 덧붙였다. 넷플릭스 영화라 해서 제외하는 일은 없을 거란 뜻이다.

BIFF가 대중성에 방점을 찍은 건 지난해 성 비위, 인사 문제 등으로 내홍을 겪으며 멀어진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다. 국고보조금 삭감 등 예산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기업 협찬과 기부금 유치 등을 통해 초청작을 늘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박광수 BIFF 이사장은 “지난해 내홍을 겪으며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려 한다”면서 “관객을 비롯해 영화인, 해외 게스트를 잘 모시겠다”고 말했다. 위기의 ‘아홉수’를 30주년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결정은 다른 초청작에서도 눈에 띈다. 방탄소년단(BTS) RM의 다큐멘터리인 <알엠: 라이트 피플, 롱 플레이스>가 ‘오픈시네마’ 부문에 초청받아 야외 극장에서 상영되는 게 대표적. 또 한국과 아시아 지역 다큐멘터리영화를 알리는 차원에서 관객이 직접 우수한 작품을 투표로 뽑는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신설하기로 했다. 김영덕 BIFF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은 “관객과 대중의 관심이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했다”고 했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전,란' 스틸. /BIFF 제공
거장의 작품 보고, AI 체험도

올해 BIFF에선 거장들의 작품도 대거 상륙한다.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뱀의 길>과 <클라우드> 두 편의 신작이 상영된다. 포르투갈의 영화 거장 미겔 고메스 감독을 특별 기획 프로그램에 초청해 그의 장편 전작 8편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중국 영화 거장 지아장커의 신작으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던 <풍류일대>와 프랑스 여성 감독 파트리샤 마쥐이의 작품으로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도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으로 소개된다.

폐막작은 프랑스와 싱가포르 일본 3개국이 공동 제작한 ‘영혼의 여행’이 선정됐다. 프랑스 배우 카트린느 드뇌브가 주인공을 맡은 작품으로, 죽고 나서도 이승에 떠도는 영혼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묻는다. 영화를 연출한 에릭 쿠는 싱가포르인 최초로 칸, 베를린,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감독으로 유명하다.BIFF는 최근 영화계 화두인 인공지능(AI)도 다룬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시아 영화제 중 처음으로 AI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는 부스를 연다. 10월 6일에는 AI 기술과 영화의 융합에 대해 논의하는 콘퍼런스도 진행한다. 박광수 이사장은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마이크로소프트가 AI와 관련한 여러 행사를 하는 모습을 봤다”면서 “앞서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대대적으로 AI 관련 행사를 열었는데, BIFF에서도 AI와 영화 산업을 접목할 수 있는 지점을 짚어보려는 취지”라고 했다.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 모습. /BIFF 제공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