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을, 기억이 멀어져간대도 더는 서글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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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몸이 기억하는 '절차 기억'
햇살이 길게 늘어진 오후, 책상에 앉아 오묘한 빛깔의 결명자차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수십 년 전 할머니 댁 냉장고에서 꺼내 마셨던 바로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아, 이제는 결명자차도 음료수병에 담겨 판매되는구나’하는 마음에 반가움이 컸고, 마치 스스로가 ‘할머니의 쪼꼬만 놈(어린아이를 뜻하는 황해도 방언으로 막내딸의 막내아들인 저를 할머니는 그렇게 부르셨습니다)’에 불과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당시 많은 가정에서 그랬듯 할머니 댁에는 다 먹은 후 재사용 중인 오렌지 주스 유리병에 결명자차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유려한 곡선의 유리병 디자인과 구수하면서도 개성 있는 결명자차의 맛이 잘 어우러져 목으로 넘기는 순간 온몸이 시원했던 기억이 여전히 뚜렷합니다. 결명자차가 꼭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았습니다.손가락엔 뇌가 없어요
영국의 유력 언론사인 <가디언>지(紙)의 편집국장이었던 앨런 러스브리저가 피아노를 연습하며 쓴 책이 있습니다. <다시, 피아노>라는 책입니다. 앨런 러스브리저는 당시 위크리크스를 통해 첩보기관의 비밀을 폭로하던 줄리안 어산지를 취재하며 동시에 프레데리크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를 연습했습니다. 신문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렸기 때문인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사건과 피아노 연습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는 묘하게 교차 편집됩니다. 책에는 머레이 페라이어처럼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앨런에게 연주법을 조언하는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 절대로 잊지 못하는 단어는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절차기억’입니다.주로 악기 연주와 운동, 자전거 타기와 운전처럼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 비(非)서술적 기억을 일컬어 ‘절차기억’이라고 부릅니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죠. 우리의 손가락 마디 끝마다 두뇌가 달린 것 마냥 악보가 정해 놓은 시간에 완벽한 압력으로, 모든 근육이 약속이나 한 듯이‘딱 그 건반’을 짚어내는 것이 바로 ‘절차기억’ 덕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아릴 수 없이 축적된 시간이 만들어내는 이 기억은, 연습이 지속되지 않을 경우 빙봉(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서서히 사라져간 코끼리 모습의 캐릭터)처럼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로버트 M. 새폴스키는 그의 책 <행동: 인간의 최선의 행동과 최악의 행동에 관한 모든 것>에서 절차기억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인용해봅니다.
“이마엽 겉질은 쉬지 않고 일하는 초자아다. (중략) 예를 들어 내가 피아노로 어떤 곡을 연습한다고 하자. 까다로운 꾸밈음이 있는데, 그 소절에 다가갈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온다, 온다, 명심하자, 팔꿈치를 붙이고, 엄지로 시작하는 거야.’ 작업 기억을 써야 하는 고전적 작업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꾸밈음으로부터 이미 다섯 소절이나 지났고 꾸밈음이 잘 연주되었으며 내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꾸밈음 연주가 이마엽 겉질에서 그보다 더 반사적인 뇌 영역으로 이동한 순간인 것이다. 이런 자동성으로의 전환은 우리가 스포츠에 능숙해질 때, 비유적으로 말해서 굳이 생각할 필요 없이 몸이 알게 될 때도 벌어진다”
저도 ‘절차기억에 관한 경험’이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어 사카모토 류이치의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레인’, ‘아쿠아’, ‘철도원’, ‘에너지 플로우’ 같은 곡을 열심히 연습했던 때가 있습니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기에 초견이 어려워 악보마다 빼곡히 계이름을 써 가며 손에 익혀야만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앙드레 가뇽(Andre Gagnon)의 ‘첫날처럼’, ‘조용한 날들’ 같은 서정적인 곡을 익히기도 했고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2악장’ 전체를 연습한 적도 있습니다. 손가락과 손목, 팔, 어깨는 신기하게도 악보에 따라 제 위치를 찾아갔습니다. 손가락 마디 끝에 뇌가 달 것이 아니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바로 ‘절차기억’이었다는 건 한참 뒤에 <다시, 피아노>를 읽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영화 속 다양한 기억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2017)>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개봉했던 영화 <마조리 프라임>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등 겉보기엔 공상과학적 요소를 많이 갖췄지만, 엄밀히 말해 ‘기억’에 관한 영화입니다. 인상적인 장면과 문장이 많았던 가운데, 영화 속 인물 ‘마조리’의 대사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기억에 관한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마조리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야,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야”라고 읊조립니다. 아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 어린아이 시절의 추억은 사실 생생하게 기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몇 살 때까지는 기억했었다’ 정도일까요? 저희 부모님도 영유아 시절의 저를 키우며 “이 아이는 참 기억력이 좋구나”라며 기특하게 여기셨을 텐데, 정확히는 ‘기억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어린이에 불과했을 듯합니다.‘기억했었다’는 사실을 가슴 시리게 그린 영화도 있습니다. 바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2012)>인데요. 평화롭게 노후를 보내던 부부에게 예상치 못하게 건강 악화가 찾아왔고, 아내가 더 이상 예전처럼 생각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 남편인 조르쥬는 환상을 봅니다. (어쩌면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일 것 같습니다) 아내인 안느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죠. 건강이 더욱 악화해 이제는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게 된 아내 안느, 영화에선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는 그 상황에 조르쥬는 다시 한번 외출 준비를 하는 아내의 환상을 봅니다. 바로 기억 때문이죠.미래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영화도 있죠. 드니 빌뇌브의 <어라이벌(2016)>서 인물의 회상처럼 보이는 장면이 사실은 과거에 관한 기억이 아닌 것임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기억이란 참 단순하지 않구나’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기억·기록·기시감
아이들을 키우며 더 이상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자 사라지는 절차기억을 향한 아쉬움이나 박탈감이 커졌습니다. 헤엄을 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해주는 절차기억이 늘 온전한 데에 반해 악기연주나 외국어 회화는 조금이라도 연습을 소홀히 했다간 완전히 잊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다만, 가끔 즐겨 듣는 음반을 재생하며 눈으로 악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찾게 됐으니 위안으로 삼는 중입니다. 여기에 더해 ‘아, 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지’라는 먼 기억(記憶), 악보나 일기에 담은 ‘기억에 관한 기록(記錄)’, ‘지난번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네’ 하는 기시감(旣視感)이 겹치면서 그럭저럭 서글퍼 하지 않게 됐으니 참 다행인 가을입니다.김현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