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카즈 감독처럼 저도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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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통조림 뚜껑을 접는 마음
한 주에도 몇 번씩, 각종 요리와 반찬을 위해 참치, 꽁치, 햄, 옥수수 등이 담긴 통조림을 뜯으면 특유의 원통형 용기를 밀봉하기 위해 비슷한 소재로 마감한 금속 뚜껑을 열어야만 합니다.그런데 이 과정에서 금속 소재 특유의 예리한 뚜껑은 손을 베일 만큼 얇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생깁니다. ‘쓰레기통에 대충 버렸다가 이를 무심코 집는 다음 사람이 다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그 작은 우려는 어머니의 분리수거를 어깨너머로 볼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재활용되기 이전까지 분리되어 수거된 각종 물건을 만지다가 다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바람 때문이죠. 그렇다고 해서 통조림 뚜껑을 휴지로 둘둘 말아 소각용 쓰레기봉투에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그래서 꽤 오래전부터 모든 통조림 뚜껑은 다른 접시처럼 깨끗하게 비누로 닦은 후에 반으로 접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뾰족한 면이 좀 남지만 날카로움은 한결 덜게 되니 말입니다. 통조림 뚜껑을 반으로 접는 과정은 적당한 악력이 필요한데 방심이라도 했다간 손을 다칠 수 있으니 나름대로 요령도 필요합니다. (가끔은 뚜껑을 접다가 살짝 베기도 합니다)모두가 통조림 뚜껑을 반으로 접어 버리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세상의 위험을 아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포기하지 말아야겠죠. 같은 이유로, 설거지를 하다가 실수로 깬 접시나 컵을 버릴 때도 ‘절대로 아무도 베이는 일이 없게끔’ 선물 포장을 하듯 밀봉하는 습관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습니다.분리배출도 공부가 필요해요‘분리배출’ 표시 읽기를 철저히 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나 봅니다. 플라스틱 하나에도 종류가 워낙 많으니 재활용이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연습도 해야만 했습니다. 분리배출 특유의 삼각 화살표 안에 PET(페트,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HDPE(고밀도 폴리에틸렌), PP(폴리프로필렌)라고 쓰여 있다면, 정말 감사하게도 재활용이 원활하지만, 김칫국물이 스며드는 PS(폴리스티렌)의 경우엔 사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비닐봉지’라고 부르는 LDPE(저밀도 폴리에틸린)나 OTHER(아더, 기타 복합 플라스틱)로 분류되는 것은 재활용이 어렵다고 하니 일반 쓰레기로 배출해야만 합니다. 저보다 분리배출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은 아내가 어느 날 저녁 한마디 합니다.
“비닐과 아더는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도 재활용이 안 돼. 그냥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려야 물이라도 아끼지” 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 이후로는 김칫국물이나 양념이 잔뜩 묻은 비닐은 굳이 빨지 않고 있습니다. 물을 아끼는 쪽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믿게 됐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은 “아빠, 다른 집들은 다 대충 버리는데 우리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환경부 공무원들이 분리배출을 교육하기 위해 제작한 영상 속 아빠처럼 대답합니다. “우리라도 해야지”
무엇이든 배달해 먹게 된 시대에는 오히려 배달 음식을 먹지 않지만, 특별한 날에는 아이들을 위해 중화요리(거창해 보이지만 짜장면, 짬뽕을 말합니다)를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주 예전부터 각종 요리를 담아낸 그 접시를 깨끗하게 설거지해서 수거 봉투에 넣는 일이 습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음식이 배달될 때 수거 봉투가 동봉되는데, 음식물 없이 깨끗하게 세척된 접시를 넣어 놓으면 그것을 바라보는 이는 아주 잠시라도 기쁜 마음이 생길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아주 오래된 습관입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짜장면과 군만두를 즐겼던 학창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배웠던 것인데요.
아마도 저와 형도 그때 똑같이 물어봤을 겁니다. “엄마, 왜 우리 집만 이렇게 해요?”라고 말이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접시를 돌려받는 사람이 기분 좋으니까”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의 책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와 수많은 영화를 통해 밝혔듯 타인을 향한 작지만 따뜻한 시선을 품은 예술가입니다. 가장 최근 영화인 <괴물>(2023)에도 작지만 놀라운 힘이 묘사됩니다.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는 인물 호리 선생님을 향해, 여자친구를 비롯해 주변의 동료들은 늘 그 미숙함을 꾸짖습니다. 특히 오탈자(誤脫字) 찾는 취미를 갖는 이 인물을 한심한 듯 바라보죠. 그런데 보잘것없는 일로 묘사되던 선생님의 취미는 두 주인공 ‘무기노 미나토’와 ‘호시카와 요리’만의 비밀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타인의 기준에서 볼 때 호리 선생님과 두 아이는 평범하지 않기에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묵묵히 서로의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쿠아(Aqua)’가 흐를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우리에게 이렇게 위로를 건네는 것만 같습니다. “보세요. 헛되지 않았어요”그래서 저도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