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하룻밤에 전부를 바친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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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 정은채배우 정은채의 캐릭터는 ‘의외’이다. 意外. Unexpected이다. 그녀는 의외로 영국의 명문, 런던 예술 대학(UAL)의 패션 칼리지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다녔다. 정확하게는 다니다 말았다. 정은채는 그래서 ‘의외로’ 영어를 매우 잘한다.
한 장면의 슬픔과 고독으로 기억될 정은채
눈썹 하나 꿈틀대며 전부를 설명하지
예상을 뛰어 넘는,
의외의 연기력을 지닌 배우 정은채
화려한 외모 뒤에 사연을
한가득 안고 있을 것 같은 여인의 이미지
엎드려 자는 모습에서 고독을,
눈썹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외로움 표현해 내
그녀는 키가 172cm로 꽤나 크고, 완전한 서구형 외모를 지녔다. 서구식 백치미의 얼굴이다. 어디를 보나 현대극, 현대 드라마에 어울린다. 그런데 ‘의외로’ 사극에도 나름 착착 붙는다. 대표적인 작품이 ‘안시성’이다. 하지만 ‘안시성’은 주연급 캐릭터들의 과도한 몰입 연기로 영화가 다소 국뽕 급으로 엉망이 되느라 정은채가 그리 잘 살지는 못했던 작품이다.정은채는 ‘안시성’에서 초개 같은 충절 따위, 헌신짝 버리듯 우리 편을 배신하는, 유일하게 입체적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런데 감독이 그 부분을 잘 살리지 못했다. 아니, 미루어 짐작하건대 모든 에너지가 양만춘 역의 조인성에게 쏠리느라 잘 살리지 ‘않은’ 배역이 됐다. 정은채의 사극 연기 중 내면의 이중성을 잘 살린 영화는, 이번에도 의외로 ‘역린’이다. 이 영화에서 정은채는 나인인 월혜 역으로 나온다. 월혜는 정조를 죽이기 위해 길러진 살수(殺手)인 을수(조정석)를 연모하고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데리고 떠나 줄 것을 바라지만 그걸 내놓고 얘기하지는 못한다.
월혜도 을수처럼 킬러 양성소에서 자란 여인이다. 궁궐 내에 침투한 역적들의 첩자이다. 역적들, 특히 정순왕후(한지민)는 당파의 한쪽을 등에 업고 정조를 죽인 후 권력을 잡으려 한다. 월혜는 이 모든 것을 살피고 엿본 후 거사를 성공시켜야 하지만 결국 정조에게 모든 정보를 알려주게 된다.역사적 비장함과 인간적 애잔함의 사이에 정은채의 눈망울 연기가 자리해야 한다. 정은채는 그 역할을 무난히 수행했는데 ‘의외로’, 이 여배우의 서구적 외모가 사극에서 전혀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길게 땋은 머리가 오히려, 그래서 진실로 ‘의외로’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그 이상한 언밸런스의 밸런스가 정은채를 화제의 드라마 ‘파친코’로 가게 한 셈이다. 정은채는 한복과 서양식 의상이 동시에 어울리는 배우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서 샤넬 시대로 넘어가는 여성 모자 클로시 혹은 종 모양 모자 스타일이 아주 잘 어울린다. 그녀에게 ‘파친코’는 최적격의 작품이고 스스로에게 잘 맞는 의상 같은 작품이다. 정은채가 여기서 맡은 경희는 요셉과 이삭 형제 모두와 부부로 살게 되는, 굴곡진 인생의 신여성 캐릭터이다.
정은채는 그 화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뭔가 사연이 많은, 인생 스토리 한 다발은 갖고 있을 것 같은 여인의 이미지를 풍긴다. 실제로 그런 역할에 아주 잘 어울린다. ‘파친코’ 시즌 1, 2는 정은채에게 절호의 기회 같은 작품이다. 영어도 잘해, 신장도 커, 마치 중국의 리빙빙 같은 외모를 지녔기 때문에 1985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만든 ‘커튼 클럽’ 같은 고전미 물씬 풍기는 할리우드 영화에 캐스팅되기에 안성맞춤이다.아니면 리빙빙 마냥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나오게 되거나. 어느 쪽으로든 기회의 문이 열리게 되는 셈이다. 정은채는 ‘파친코’ 시리즈를 딛고 이제 올라갈 계단만 남았다. 그 계단을 내려오기까지 한 20년은 정상에 있을 수 있다. 여배우로서는 행복한 헤이 데이의 시기이고 따라서 더욱 철저한 자기관리가 요구될 때일 것이다.정은채가 연기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이었다. 유부남과 사귀는 미모의 여대생. 배우 출신인 엄마에게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동경 의식을 떨치지 못하는 여자. 끊임없이 꿈을 꾸고 그 내용 때문에 외로움의 고통에 시달리는 실존의 여자.
해원은 남자 성준(이선균)과 계속해서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지만 어느덧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경계가 무너진다. 성준과 헤어지려는 자신이 현실인지 계속 만나고 싶어 하는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정은채는 도서관에서 엎드려 자는 연기를 선보이는데 사실 이런 연기가 배우에게는 가장 어려울 것이다. 머리맡에 놓여 있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정은채의 연기가 만만치 않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줬던, 단 한 컷의 장면이다.사실 정은채의 연기가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영화는 2017년 김종관 감독이 찍었던 ‘더 테이블’이다. 정은채는 여기서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나온다. 경진이란 여자는 민호라는 남자와 원 나잇 스탠드로 만났지만 그를 잊지 못한다. 하룻밤의 밀어는 너무 달콤했으며 그 순간을 위해서 전부를 바칠 수 있을 만큼 남자의 매력에 빠졌다.
무엇보다 경진은 외롭다. 그런데 남자가 말도 안 하고 떠났으며 말도 안 하고 돌아와서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금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그는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여자는 남자의 진심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저, 남자의 여행길에 좋은 곳에 가면 사진 한 장이라도 보내 줄 줄 알았다는 말로 자신의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는 정도이다. 경진은 남자가 앞에 있지만 여전히 외로우며, 사랑이란 것 자체가 외로움의 깊이를 더할 뿐이라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더 테이블’은 사랑에 대한 인식과 그 깊이가 남다른 영화다. 이건 단순히 감독의 구변(口辯)으로만 엮어 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김종관 감독의 뜨거우면서도 메마른, 영원히 잊을 수 없거나 혹은 하루라도 빨리 잊고 싶은 연애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랑의 이야기는 사실은 늘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감독의 시선, 감독의 기억이 대체로 여자 쪽에 맞춰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영화는 전적으로 여성주의적인 작품이다.
정은채 분량의 에피소드는 거의 전부가 클로즈업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눈썹 하나 꿈틀대는 미세한 표정 연기가 내면의 전부를 설명한다. 대사보다 작은 액션 하나하나가 더욱 중요한 이유이다. 정은채는 이 대목에서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다. 이 영화 때문에 정은채를 새로 보게 된 평론가들이 많다. 나도 그 일인이다.부산 출신임에도 전라도 사투리를 척척, 능청맞게 써대기도 한다. 정은채는 한재림 감독이 만든 ‘더 킹’(2017)에서 조인성의 동생으로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는 비록 조연급이었지만 비중이 높았으며 무엇보다 이 여배우가 연기 욕심,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자기 노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는 걸 입증해 냈다. ‘더 킹’의 성공으로 정은채는 메인 스트림 대열에 올라섰다.
정은채 스스로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드라마만큼 영화에서 더 강하고, 더 섹시하며, 더 인상적인 연기를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파친코2’ 직전 정은채는 tvN 드라마 ‘유어 아너’로 돌아왔으며 여성 검사 강소영 역을 맡았다. 머리를 짧게 잘랐고(가발일까?) 자신의 외모에 어울리는 모던한 이미지로 나왔다. 그녀는 한동안 TV와 OTT를 오가는 글로벌 스타로 성장할 것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정은채의 연기(외모가 아니라)를 보고 있으면 미국의 아나벨라 시오라 생각이 난다. 1990년대에 한창 활동했던 매력의 여배우이다. ‘어딕션’ ‘요람을 흔드는 손’ ‘정글 피버’같은 영화의 히어로인이었다.‘굿바이 마이 프렌드’에서 큰 눈으로 눈물 덩어리를 뚝뚝 흘리던 연기를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의 아들이 에이즈에 감염됐고 그래서 차별을 받게 되자 울분과 슬픔과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아들 친구의 멱살을 잡고 흐느끼는 장면에서다. 정은채가 그런 연기를 잘할 것이다. 여배우는 늘 한 장면의 슬픈 모습으로 기억되곤 한다. ‘더 테이블’에서의 정은채를 잊을 수가 없다. 정은채는 사랑스러운 여배우이다.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