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 타고 돌아온 선율, 눈 감고 즐기는 존 카니의 음악영화

음악영화 ‘비긴 어게인’, ‘원스’ 극장 재개봉
잔잔한 스토리에 인상 깊은 OST로 인
영화 '비긴 어게인' 스틸. /판씨네마
영화는 본질적으로 ‘이미지의 예술’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눈을 감고 귀를 열어야 더 와닿을 때가 있다. 때론 장면에 삽입된 한 줄기 선율이 대사를 대신해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고, 서사를 이끌기 때문. 보는 재미만큼, 듣는 맛도 알아야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잘 만든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 하나가 영화 제목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다.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듣는 영화’ 두 편이 상륙했다. 음악영화 명장으로 꼽히는 존 카니 감독의 작품 ‘비긴 어게인’(2014)과 ‘원스’(2007)가 다시 스크린에 걸렸다. 오래전 관객들에게 사랑받은 작품들답게, ‘베테랑 2’ 독무대가 된 가을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24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18일과 19일 각각 재개봉한 ‘비긴 어게인’과 ‘원스’가 독립·예술영화 부문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지난 주말(20~22일) 기준 ‘비긴 어게인’은 4만4333명, ‘원스’는 4799명이 관람하며 각각 이 부문 누적 관객 수 1위, 4위를 기록했다.

외로운 뉴욕의 밤거리를 채운 음악의 힘

이 중 국내 개봉 10주년을 맞아 재개봉한 ‘비긴 어게인’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인기 애니메이션 ‘사랑의 하츄핑’(4만3710명)을 제치고 ‘베테랑 2’(91만4543명)에 이어 주말 전체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했다. 작품 속 대표 OST인 ‘Lost Stars’도 벅스뮤직 일간 차트 9위에 오르는 등 음원차트 역주행 중이다.
영화 '비긴 어게인' 재개봉 포스터. /판씨네마
‘비긴 어게인’은 국내 개봉한 다양성 영화 중 가장 크게 흥행한 작품이다. 10년 전 개봉 당시 무려 33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약 800만 달러의 제작비에 다섯 배가량의 수익을 올렸는데, 이 중 약 40%를 한국에서 벌어들였을 정도다. 당시 8월에 개봉한 영화는 초반 스크린과 관객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9월부터 작품성과 OST가 입소문을 타며 흥행 ‘대박’을 쳤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장황한 대사가 아닌 음악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점에서 감정이 풍부한 한국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였다”고 했다.

할리우드 인기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그레타 제임스 분)와 마크 러팔로(댄 멀리건 분), 유명 밴드 마룬5의 보컬 애덤 리바인(데이브 콜 분)이 출연한 ‘비긴 어게인’은 사람 사이를 오가는 섬세한 감정을 노래로 풀어낸 영화다. 상업적인 유행에 뒤처진 몰락한 프로듀서와 음악적 동반자인 연인의 외도로 갈 곳을 잃은 싱어송라이터가 대도시 뉴욕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둘의 만남으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흔한 액션이나 코미디 요소가 없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뻔한 로맨스가 없다는 점이 영화의 매력이다. 두 사람의 감정을 “사랑한다”는 대사나 키스신처럼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정의 내리는 대신, 때마다 흘러나오는 OST가 인물들의 교감이나 마음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미묘한 감정선을 자극하는 노래들이 뉴욕 밤거리와 어우러지며 가을 타기 시작한 관객들의 감수성을 자극한 것이다.
영화 '원스' 스틸. /네이버영화
찬 바람 부는 더블린을 녹인 사랑의 순간

존 카니 감독의 영화에서 음악은 따분한 일상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물과 관객이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다. 다만 ‘비긴 어게인’이 특급 배우들의 연기와 스토리텔링에 음악을 입혔다면, 7년 앞서 개봉한 ‘원스’는 보다 날 것에 가까운 음악영화라 할 수 있다. 스토리 전개에 음악을 끼워 넣는 인위적인 면이 없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가 영화를 두고 “수수함과 절제의 설득력을 보여주는 뮤지컬의 진정한 미래”라고 평가한 이유다.

실제로 ‘원스’의 설정은 ‘비긴 어게인’보다 더 거칠다. 거리에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가난한 싱어송라이터인 ‘그’(The Guy)와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형편이 어려워 포기하게 된 ‘그녀’(The Girl)가 주인공이다. 따로 이름이 나오지 않는 두 남녀가 우연히 서로의 음악 색깔이 닮아있다는 걸 알아채고, 작곡과 작사를 함께 하며 스치듯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영화 '원스' 재개봉 포스터. /제이앤씨미디어
갈등 하나 없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잔잔한 스토리에 배우들의 연기도 어딘가 어색한 면이 있지만, 더블린 길거리, 펍(술집)의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서 두 사람이 연주하는 곡이 하나 같이 인상적이다. 주연을 맡은 글렌 한사드와 마르게타 이글로바가 본업 뮤지션으로, 직접 음악을 작곡하고 불렀기 때문. 두 사람이 영화 출연 후 ‘스웰 시즌’이라는 밴드로 함께 활동하고 연인으로도 발전하기도 했다.

‘원스’는 고작 10개 극장에서만 개봉했는데, 23만 2000명이 관람하며 당시 국내 다양성영화 사상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제3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선 개막작으로 상영됐고,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OST ‘Falling Slowly’가 주제가상을 받는 등 국내외에서 화제를 낳았다. 이번 재개봉에서도 130여개 스크린만으로 음악영화 마니아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