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애착이 부족했던 고흐에겐 '노란 안전기지'가 있었다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안전기지’ 노란 집
'노란 집'에서 고흐의 예술 세계가 펼쳐졌다
종종 지나다니던 라마르탱 광장의 북동쪽 모퉁이에 허름한 이층집이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채 몹시 낡았지만 노란색 회반죽이 유난히 어른거렸다. 놀랍게도 이 노란 집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마음을 잠재웠다. 불현듯 고흐는 이 집이야말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리라 믿었다.

노란 안전기지 가끔 우리는 어지럽게 흩어진 집안을 정돈하며 심신의 안정감을 얻는다. 편안한 집은 지친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기 때문이다. 고흐가 강한 애착을 보인 노란 집은 턱없이 싼 월세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고 주인에게마저 방치된 채 폐건물과 다름없었다. 이 집은 고흐가 그린 '노란 집'(1888)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앞 건물의 오른쪽이 그가 살던 집이다. 어두운 회색으로 바랬었던 문들이 그의 손길을 통해 그림 정중앙에서 초록빛을 내고 있다. 왼쪽에 있는 집은 식료품 가게였으며 바로 뒤에는 카페가 있다. 오른쪽으로 큰 길이 나 있어서 먼지가 많은 데다가 행인들과 근처 홍등가 때문에 밤낮없이 떠들썩했다. 멀리 오른쪽 중앙에 있는 다리로 기차가 지나다녔기에 소음도 심했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거리), The yellow house(street)>, 1888 / 그림출처. ©Van Gogh Museum
이 불편한 노란 집에 고흐는 1888년 5월 1일, 하필 자신의 서른한 번째 생일에 세를 들었다. 당장에라도 새롭게 되려는 듯 급히 이사를 했고 집에 틀어박혀 정성껏 매만지고 다듬었다. 심리학에 따르면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어린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요소로 부모와 형성된 긍정적 애착 관계가 있다. 이것은 어린 자녀에게 ‘안전기지(Secure Base)’가 되어 자신감을 얻게 한다.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안전기지’가 사람뿐만 아니라 물리적 공간, 즉 집에 대한 정서적 유대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집에서 안정을 얻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부족했던 고흐는 타인들에 줄곧 집착해 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적 감정에 치우쳐 사소한 일로도 상처받았다. 인간관계에 몹시 지쳤던 고흐는 허전하거나 두렵지 않은 ‘안전기지’를 물리적 공간에 마련하고 싶었다. 놀랍게도 노란 집의 든든함이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업에 열중하도록 했다.

5월부터 시작한 집 꾸미기는 4개월간 계속되었다. 어지간히 헌 데를 손보았던 고흐는 1층 거실과 부엌을 작업실로 바꾸고 2층의 작은 방 두 개를 침실로 만들었다. 벽은 하얀색 회반죽을 발랐다. 하지만 왠지 허전해 보였다. 자신이 그린 수십 점의 작품을 나무틀에 넣어 전체 벽에 걸었고 심지어 위층의 작은 침실에까지 배치했다.부엌 벽도 비워 두지 않고 평소에 걸었던 복제화와 함께, 수많은 초상화, 그리고 채색된 인물 습작들을 추가했다. 침대, 매트리스, 다양한 침구, 거울, 화장대, 서랍장, 의자 등 작은 필수품까지 장만했다. 현관 양쪽에다 화분을 놓고 꽃을 심었다. 고흐의 인생 중 가장 큰 공이 들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침실 (The Bedroom)>, 1888 / 그림출처. ©Van Gogh Museum
화가 형제단

고흐는 노란 집에 ‘남부 아틀리에’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는 “감각이 명민해지고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시선이 예리해져서 생각이 맑아진다.”라고 자랑했다. 친구였던 에밀 베르나르가 고흐로부터 노란 집에 대한 편지를 받고서 깜짝 놀라 다음과 같이 외쳤다."아아, 꿈들! 그 꿈들! 엄청난 전시회와 화가 형제단을 설립할 장소라니!"

고흐는 곤경에 처한 외로운 화가들을 떠올리며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그의 꿈은 길거리를 배회하며 수없이 삼켰던 눈물에서 싹텄다. 생계가 막막해 마음껏 작업할 수 없었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가난한 화가들을 떠올렸다. 앞서가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카페 구석에서나 그림을 그리고 싸구려 여인숙을 전전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 꿈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고 애써 역사의 사례를 찾았다. 서로를 아꼈던 중세 말의 장인 길드에서부터 경제적, 예술적 부족함을 상호 보완했던 황금기의 네덜란드 화가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자연 속에서 작업하며 영감과 열정을 공유한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가 본보기였다.

고흐는 자신이 만들 공동체를 북유럽에 퍼져 있던 기독교 개혁 운동인 모라비아 형제단(Unitas Fratrum)에 겨눌 야심을 품었다. 그는 노란 집에 꾸밈없이 순수한 사제들의 이미지를 투영하니 가슴이 벅찼다.

고흐는 재정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방안도 세웠다. 화가 형제단은 누구든지 성공하면 그 수익을 다른 동료들과 공평하게 나누는 조합의 형태가 될 것이다. 뜻을 같이한다면 동생과 같은 화상도 공동체에 가담하길 원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는 자들이 생계에 매인다는 것은 사실상 속박이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금수저’만 한가롭게 예술을 하는 이 엄청난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자고 했다. 화가 형제단은 화상이나 화가가 서로의 생계를 돌보고 작업실, 음식, 물감 등을 제공하며, 그것으로 인류에 길이 남을 예술을 펼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동생에게 물질적으로 의존했던 고흐는 예술가 공동체의 이상을 통해 동생에게 가졌던 빚진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림 그릴 형편도 아니면서 동생에게 빌어먹는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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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집에 이사한 즉시 고흐는 머리로만 품었던 공동체의 이상을 구체화했다. 세 명의 친구들에게 초대 편지를 했다. 가장 먼저 그동안 생각이 통했던 베르나르에게 알렸다. 또한 덴마크 친구였던 무리에 페이터슨과 미국인 친구 맥나이트에게도 알렸다. 하지만 베르나르와 페이터슨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것이라고 알려왔으며 맥나이트와는 생각이 맞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초대

고흐는 파리의 화가 중에 또 한 사람을 떠올렸다. 테오가 성공을 기대하며 상당히 많은 작품을 사들였던 폴 고갱. 하지만 노란 집으로 초대하려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자신보다 조금 일찍 파리를 떠났던 고갱은 말끝마다 신세를 한탄하며 몇 차례 연락을 해왔었다. 고흐는 그것을 흠잡으며 테오에게 편지했다.

“그는 온갖 괴로움을 입버릇처럼 말한단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 힘든 줄도 모르고 말이야. 항상 돈이 없어서 미치겠다는데 앞으로도 거지 근성을 못 면할 것이야. 아무래도 그는 궁핍 속에서도 교훈을 얻을 위인은 못 될 것 같다.”

고흐는 아홉 살이나 많은 고갱에게도 편지했다. “병약함은 모든 화가에게 내려진다.”라고 위로하며 고통을 참고 버티어내길 바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부로 와서 함께하자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모두 못 오게 되자 고흐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사람이 그리워 고갱을 초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고흐의 애착 관계는 사람이 아닌 노란 집으로 향했고 자신의 안전기지에 동지들이 모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감정을 가라앉힌 고흐는 어떤 게 예술인 공동체에 이로운지를 숙고했다. 고갱에게 이미 투자했으며 앞으로 그에게도 생활비를 지급해야 할 동생의 재정적 부담을 덜고 싶었다. 테오에게 자신의 계획을 “순수한 사업 문제”라고 제시하며 대략의 예산안을 보냈다. 고흐에게 보내 주던 돈에 매달 100프랑만 더하고 고갱의 작품을 한 점씩 요구한다면 투자한 돈 이상을 거둘 것이라고 했다. 또한 고갱이 같은 공간에 있다면 두 사람이 한 사람 비용으로 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고갱만 성공한다면 형의 작품도 유명해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고갱을 확보하면 손해 볼 리는 없단다.”

고흐의 제안을 받은 테오는 곧바로 사업을 추진했다. 1년에 열두 점의 유화를 받는 대신 매달 150프랑을 줄 것이며 빚을 갚아 주고 여행 경비도 대 준다고 뜻을 맞췄다. 마침내 고흐는 고갱에게 초대의 편지를 썼다. 노란 집에 이사한 지 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동생과 저는 당신의 그림을 아주 높이 칩니다. 저희 형제는 신중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상의했고, 좀 더 실제적으로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 우리가 합친다면 동생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충분한 돈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저도 병든 몸으로 이곳에 왔지만, 이제는 좋아졌죠. 이곳에 예술의 미래가 있습니다. 아주 멋지고 아주 새로울 것입니다.”

며칠 만에 고갱의 편지가 노란 집에 날아들었다. 형제의 사업 계획은 약삭빠른 전직 은행가였지만 지금은 무일푼으로 병들어 침상에 누워 있는 고갱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고흐는 초대에 응한 고갱의 건강을 염려하며 “냉수, 신선한 공기, 소박한 음식, 품위 있는 의복, 단정한 침상”으로 이루어진 수도사 같은 삶을 권했다. 고흐도 자신의 수염을 잘랐고 머리를 밀었다. 이제야 화가 형제단의 현실적인 첫 단추를 끼우게 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Self-Portrait)>, 1887 / 그림출처. ©Van Gogh Museum
고흐는 노란 집이라는 ‘안전기지’를 확보한 후 분명한 변화를 보였다. 먼저 동생에게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했다. 이렇듯 고흐는 이상을 현실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사업을 추진하려고 내키지도 않는 고갱을 초대했다. 사적 감정과 공적 업무를 명확히 구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출렁거렸던 감정적 소용돌이에서 잔잔한 바다와 같은 안전지대로 입항한 것이다.

노란 집은 고흐에게 회복의 장소이자 쉼터이듯 집은 그 든든함으로 우리에게 원천의 힘을 선사한다. 우리들의 감정을 추스르고 이상을 현실화하게 만든다. 우리에겐 저마다의 노란 집이 필요하다. 비록 단출하고 색이 바랬을지라도 이제 그 집을 꾸밀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이 있으면 좋겠다.그래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이라도 집을 매만지고 다듬고 꾸민 날을 우리의 생일로 삼으면 어떨까? 황량한 세상에서 당당하게 버티려거든 저마다의 노란 집을 매만지자. 우리 모두 자신의 안전기지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