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았던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의 손톱 만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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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효진의 이상한 나라의 그림책릴리펏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의
권력자들 비판하는 내용 담아
출간 당시 금지되거나 편집 강요당해...
세상에 관심 가져달라는 것이
이 책에 담긴 작가의 메시지
<걸리버 여행기>하면 떠오르는 것은 작은 소인들이 걸리버를 둘러싸고 줄과 못으로 머리카락까지 바닥에 고정해 놓은 그림이다. 어렸을 때 책을 볼 때마다 소인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인국 사람들이 줄지어 음식을 가져다주고, 전쟁이 났을 때도 바다에 성큼성큼 걸어 나가 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임금님의 총애를 받는 멋진 걸리버의 모습에 매료되었었다.<걸리버 여행기>의 원작을 만나기 전에는 말이다. 내가 보았던 어린 시절의 소인국 임금님의 모습은 흰 수염에 왕관을 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원작에 묘사된 소인국의 황제는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외모는 강인하고 남자다우며, 오스트리아 사람처럼 아랫입술이 두툼하고, 콧마루가 우뚝하고, 피부는 올리브 빛이다. 자세가 꼿꼿하고, 몸과 팔다리의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모든 동작이 우아하고 몸가짐이 당당하다. 당시 황제의 나이는 한창때를 지난 28세 9개월로, 대략 일곱 해 동안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며 대체로 승승장구해 왔다.” 소인국의 황제는 다른 소인들보다 키가 컸으며 젊고 멋진 남성이있다. 걸리버 여행기 원작을 보며 철저하게 속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특히 각 인물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내가 어릴 적 읽고 상상해 왔던 <걸리버 여행기>와는 판이하였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은 걸리버의 손톱 만큼 정도였다.어느 날 아이의 반 친구 어머니가 연락하였다. 플레이 데이트를 하자며 주소를 보내주었다. 초대된 키즈 카페의 이름을 보고 흥미로웠다. ‘릴리펏’. 오스트리아 사람처럼 아랫입술이 두툼하고 강인한 그 멋진 젊은 황제가 다스리는 소인국의 이름이다.바로 검색창에 릴리펏을 두드려 보았다. 그 어디에도 소인국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며 연관된 검색어조차 나오지 않았다. 검색창에서는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릴리펏보다는 키즈 카페의 이름으로 더 알려진 듯했다.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는 지도를 그려놓았는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Sumatra)섬 남서부에 릴리펏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의 시선에서는 동양의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도 소인국 사림처럼 작아 보였을까?
조너선 스위프트는 직접 소인국에 살다 온 체험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이 각 장면을 상세히 묘사했다. 그에 비해 소인국 황제의 이름은 ‘골바스토 모마렌 에블레임 거딜로 시핀 멀리 얼리 구’라는 이름으로 우스꽝스럽게 표현했지만 말이다. 조너선 스위프트 vs 미야자키 하야오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 릴리펏으로 시작하여 거인국 브롭딩낵, 하늘 위에 떠 있는 섬 라퓨타, 마지막 후이넘 나라 여행으로 끝이 난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책을 통해 당시 정치인들과 사회를 비판했다. 정치권의 권력 남용, 소수 엘리트 계층이 대중을 지배하는 영국 왕권을 풍자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1726년 권력자들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판매가 금지되거나 일부분을 삭제, 편집하기를 강요당했다. 걸리버가 여왕의 궁전에 불이 났을 때 소변을 보아 불을 끄는 장면만 보아도 당시에 이 책이 얼마나 미움을 샀을지 상상해 볼 수 있겠다.
3편의 하늘의 섬 라퓨타에서는 거대한 자석을 이용해서 하늘의 섬 아래의 나라를 지배하는 장면이 나온다. 라퓨타인들은 과학과 수학에 몰두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작가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간성이나 윤리적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를 그려냈다.
라퓨타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로도 익숙하다. 과연 조너선의 라퓨타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라퓨타 중 어느 섬이 더 잘 알려져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걸리버는 책에서 일본을 여행하기도 한다. 자모시(시모사, 현재 일본 남동부의 지바현 북부)라는 작은 항구 도시에 도착하여 낭가삭기(나가사키)까지 이동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름다운 바닷가와 멋진 풍경으로 알려진 일본의 칸논자키(Kanonzaki)는 책 속에서 걸리버가 일본에 발을 디딘 자모시로 여겨지며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인간 혐오자?
4편에 나오는 '후이늠 나라'의 이야기에서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후이늠 나라는 동물 '말'의 모습을 한 '후이늠'이 인간의 모습을 한 야수 '야후'를 지배하는 나라다. 후이늠은 '말'을 뜻하지만, 실제 어원은 '대자연의 극치'를 담고 있다.
후이늠 언어에는 악한 것을 표현하는 말이 없다. 나쁘거나 옳지 않은 것을 말하고자 할 때는 원래 단어에 ‘야후’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늘흠나윌마 야후’식으로 표현한다.
후이늠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사회를 대표하지만, 야후는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본성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자연을 경외시하는 무분별한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외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인간을 괴물, 야수와 같이 묘사했다는 이유로 인간 혐오자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도덕적이지 못한 정치계와 권력, 인류 사회에 대한 염려를 표현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관심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외친다. 열었다, 닫았다, 붙임쪽지 태그로 지저분한 나의 <걸리버 여행기> 책을 보며 아이들이 궁금해하며 읽어달라고 조르고는 한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만들어 놓은 신기한 나라들의 이상한 이름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린다. 오늘도 걸리버의 나라로 또다시 여행을 떠난다.
박효진 길리북스 대표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년~1745년): 영국계 아일랜드 소설가이자 성공회 성직자다. 정치와 문학에 관심 두었고, 졸업 후 정치 활동과 문필 생활을 시작하였다. 1704년 이후 정계에서 활약하였으며, 같은 해 익명으로 풍자 작품 2편을 발표하여 작가 위치도 확보하였다. 1713년 성직자에 임명되었으나 곧 은퇴하였다. 조너선은 인간이나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는데, 그 근거로 <걸리버 여행기>는 가장 뛰어난 풍자 소설이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