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부터는 '힙한 종갓집 왕언니'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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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정민의 세상을 뒤집는 예술읽기추석도 지나 달력이 두 장밖에 남지 않은, 가을입니다. 다들 느꼈을 테지만 올해 추석은 참으로 더웠습니다. 그래서 가을 ‘추(秋)’ 대신에 여름 ‘하(夏)’를 ‘하석’이라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고들 말합니다. 명절 인사가 날씨에 관한 인사이다 보니, 친척들이 던지는 촌철살인의 팩폭(‘공부는 잘하느냐’, ‘취직은 했느냐’, 결혼은 언제 하는 거냐‘)은 상대적으로 적었을지 모릅니다.
웹드라마
"원래부터 그런 거란 게 세상에 있을까?"
'30년 종갓집 맏며느리'로 명절을 나며 느낀 것
추석, 아니 하석 연휴를 다 보내고 나니 기후변화도 참 심각한 문제이지만, 매년 두 번의 명절 연휴를 보내면서 저는 또 한 번의 실존적 고민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제가 30년이 넘게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의외의 부캐를 간직해 왔기 때문인데요. 요즘은 기후변화로 인한 날씨만큼이나 과거에 비해 달라진 명절을, 과연 어떻게 보내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런 저의 고민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유튜브 알고리즘은 매번 명절 때마다 몇 년 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웹툰 원작의 웹드라마 <며느라기>를 푸쉬해 주고 있죠.
드라마 제목인 ’며느라기‘는 ’며느리‘와 흔히 며느리를 부르는 ’아기‘를 붙여서 줄인 말인가 오해하기 쉽지만, 이 용어의 핵심은 ’기‘에 있습니다. 즉 유년기, 사춘기, 갱년기처럼 초보 며느리가 겪는 시행착오의 시기를 뜻하는 거죠.
직장에서도 수습 기간에 미숙하지만 뭔가 잘해보려고 애쓰고 선배들에게 혼나기도 하고 실수도 남발하는 시기가 있듯이 갓 결혼한 새댁에게 닥친 모종의 혼란기를 뜻하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며느라기는 있는데 ’사위기‘, 혹은 ’서방기‘는 없는 걸까요? 아마도 여자들에겐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 좋든 싫든 남편의 ’가족‘이 보너스로 딸려오지만, 남자들에겐 가끔 손님처럼 방문해서 맛있는 걸 먹고 오는 ’처가‘가 생길 뿐이어서 일지 모르겠습니다.어쩌면 아주 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법한 이 드라마가 한때 장안의 화제가 된 이유는 바로 이 드라마, 아니 원작인 웹툰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심박한 질문도 많지만 일단 명절 관련 질문만 모아보았습니다.
‘원래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되나?’
‘제사나 차례 음식은 원래 여자들이 해야 하는 일인가?’
‘원래 며느리는 얼굴도 모르는 조상들을 위해 음식을 하고 아들은 설거지도 하면 안 되나?’
‘원래 며느리는 명절에 시댁부터 가야 하나?’누군가는 ‘아니 이게 무슨 조선시대 이슈인가’라고 반문할 분들도 계시겠지만, 실은 '잡채의 레시피'를 생성형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는 21세기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명절 풍경이란 겁니다. ‘30년 종갓집 맏며느리’ 부캐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소 억울한 부분이 없진 않습니다. 워킹우먼이란 본캐를 소화하면서 20년 넘게 1년에 제사를 열 번 넘게 지냈었고, 차례상 설거지를 끝낼 무렵 도착한 시누이 밥상 차리느라 발을 동동 굴렀던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이제는 확실하게 알아버린 ‘며느라기의 부조리’를 모른 척하거나 합리화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며느라기> 주인공의 시어머니는, 자기 딸이 울면서 찾아와 본인의 며느라기 신세를 한탄하며 절규하자, 자꾸만 자신이 며느리에게 전했던 뼈아팠을 말들이 떠오르지만 고개를 저으며 애써 외면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난 아냐. 나 같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다고. 이만하면 괜찮아.”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돈다고 모두가 믿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지동설의 근거가 도처에 출현했을 때에도 몇백년간 이어지다가 한 번에 뒤집혔죠. 이른바 ‘패러다임 전환’, 즉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부르는 역사적 사실로 굳혀집니다. 패러다임 전환은 진화론이 대두되었을 때에도, 신분제가 사라졌을 때에도,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되었을 때에도 있었고, 지금 우리는 동시다발적 패러다임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챗GPT에게 잡채의 레시피를 물어보는 것도 이에 속하고요.참으로 더웠고, 그래서 당황스러웠던 2024년 추석 연휴를 보내고 나서,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는 추석도 하석이 된 마당에 ‘30년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부캐는 던져 버리고 앞으로는 ‘힙한 종갓집 왕언니’라는 부캐에 도전해보자고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저 한 가지만 생각하자고 다짐할 뿐이죠. “원래부터 그런 거”는 세상에 없다고 말입니다.
김정민 나은미래플랫폼 주식회사 ESG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