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살던 젊은 부부가 떠나던 날 [고두현의 아침 시편]

도배를 하다가
문신


도배를 한다
방 보러 와서 잠깐 마주쳤던, 전에 살던 젊은 부부처럼
등이 얇은 벽지를 벗겨내자
한 겹 초벌로 바른 신문이 나온다나는 전에 살던 젊은 부부가 떠나던 날을 기억한다
벽지 뒷면에 바른 묵은 신문처럼
쉽게 찢어지는 청춘을 내면 깊숙이 묻어두고
천천히 돌아서던 그들을 향해
나는 하마터면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할 뻔했다
그들은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어깨를 감싼 채 트럭에 올랐다
사내는 말이 없었고
아이를 안은 여자는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 톤 트럭 짐칸을 반 넘게
쓸쓸함으로 채우고 떠난 그들은
세면대 위에 닳은 칫솔 하나를 남겼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그 위에서 저물어갔던지
칫솔모는 빳빳했던 기억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새로 사 온 꽃무늬 벽지를 자르고
풀을 먹여 벽에 바르면서
나는 벽지 뒤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았다
분명 한 시절을 총총히 걸어왔을 각오들이
빛바랜 배경으로 시무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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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시인은 남들이 한 번도 당선되기 어려운 신춘문예에 네 번이나 당선됐습니다. 2004년 《세계일보》와 《전북일보》 시 당선에 이어 2015년 《조선일보》 동시, 2016년 《동아일보》 문학평론까지 석권했으니 21세기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4관왕’입니다.

《세계일보》 당선작 ‘작은 손’에서 그는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과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을 겹쳐 보이면서 죽은 친구의 빈소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했지요. 그 속에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과 “그 작은 손위에 놓여진 동전 개수만큼 침침한 저녁”을 녹여내면서 조문객들의 공허한 웃음과 생의 손바닥에 새겨진 슬픔의 무늬를 함께 그렸습니다.

그해 겨울에 발표한 시 ‘도배를 하다가’에서도 그는 평범한 생활의 단면과 인생의 깊은 이면을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그 시선이 아주 따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늘합니다. 새로 세 든 방에서 그는 “방 보러 와서 잠깐 마주쳤던, 전에 살던 젊은 부부처럼” 도배를 합니다. “등이 얇은 벽지”를 벗겨낸 자리의 오래된 신문지를 발견하고는 “젊은 부부가 떠나던 날”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벽지 뒷면에 바른 묵은 신문처럼/ 쉽게 찢어지는 청춘”을 이곳에 남기고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어깨를 감싼 채” 트럭에 올랐지요. 그들이 “닳은 칫솔 하나”를 세면대 위에 남기고 “일 톤 트럭 짐칸을 반 넘게/ 쓸쓸함으로 채우고 떠난” 자리에서 그는 “새로 사 온 꽃무늬 벽지”를 풀 먹여 바릅니다.

그러면서 “벽지 뒤로 사라지는 그들”의 삶을 하나씩 떠올립니다. 그 삶의 이면에는 “한 시절을 총총히 걸어왔을” 그들의 각오가 “빛바랜 배경”으로 얼룩져 남아 있습니다. 전에 살던 그들의 “초벌 신문” 위에 새로운 벽지로 도배를 하는 동안 그의 한 시절과 남은 생 또한 총총히 겹쳐집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인생의 한 장면을 비추는 시인의 눈빛, 젊은 날의 가난과 결핍을 무채색으로 객관화시키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작은 방 하나를 배경으로 삶의 시공간을 교직하는 감각 또한 신선하지요. 그는 이렇듯 우리 주변의 일상을 깊이 들여다보고 오래 생각하며 얻은 시적 이미지를 조곤조곤한 어투로 전달하는 ‘시의 전령사’입니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제 시는 화려한 말 잔치가 아니라 투박하고 좀 머뭇거리더라도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이랄지 아니면 애써 묻어두고자 했던 사연들을 한 번쯤 꺼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듯이, 그의 시에는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만지고 뒤집어본 손자국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벽지 뒤로 사라지는 그들”의 쓸쓸함을 이토록 처연하고도 따스하게 바라보며 “하마터면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할 뻔했다”는 고백도 이 같은 마음의 손자국 속에서 나왔겠지요.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저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그의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발굴하는 토피아, 복권되는 생활’은 당시 출간된 지 몇 개월 안 된 제 시집 『달의 뒷면을 보다』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신춘문예 평론 응모작은 오랜 기간 준비하고 다듬게 마련인데 이제 막 나온 새 시집을 텍스트로 삼았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더욱이 이현승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과 함께 비교 분석하면서 “안정된 문장과 견결한 세계에 대한 비평적 믿음이 결합된 수작”이라는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얻으며 당선됐으니, 저에게는 두 배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