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 대표 조각가 로댕 작품의 현대성을 소개한다

[arte] 전유신의 벨 에포크

'지옥의 문'에선 심판하는 자로,
묘지 앞에선 죽음을 사유하는 자로
존재하는 로댕의 조각들

벨 에포크의 상징,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로댕 조각의 현대성
불완전한 형태도 조각으로서 독립적 가치

조각이 지닌 서술적 이야기 구조를 해체
장소와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져...
'벨 에포크(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 대전 전까지 풍요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가를 한 사람만 선택해야 한다면 단연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일 것이다.

로댕은 ‘키스’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다. 카미유 클로델과의 스캔들이 영화나 소설로 여러 차례 각색되어 소개된 탓에 로댕은 ‘나쁜 남자’의 전형으로 시대를 초월해 회자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예술가 로댕을 지칭하는 가장 적절한 수식어는 ‘현대조각의 아버지’일 것이다. 미켈란젤로와 같은 고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지만, 그것을 벨 에포크라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현대화한 것이 바로 로댕의 조각이다. 오늘은 로댕 조각의 현대성이 어떤 것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귀스트 로댕, 키스, 1882, 파리 로댕미술관 소장.
로댕은 17세 되던 해인 1857년부터 조각가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당대의 유명 조각가들은 전시회에 출품할 자신의 작품을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공공 건축물의 장식 조각을 의뢰받아 제작하는 일도 했다.

로댕도 카리에 벨뢰즈라는 조각가의 작업실에서 일하는 동안 공공 건축물의 지붕과 계단, 문을 위한 장식을 만들면서 조각의 기초를 배워나갔다. 장식 조각가들의 작품 제작 방식은 전통적인 조각가들의 경우와 다른 점이 많았다. 인체 조각상을 예로 들자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를 하나로 연결해 제작하는 대신, 머리, 팔, 다리를 여러 개 따로 만들어 둔 뒤 이를 조합해 작품을 완성하는 식이다. 로댕도 이런 제작법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 활용했다.

인체 각 부위를 나누어 제작한 뒤 조합해 재구성하는 이런 제작법은 ‘마르코타주’로 불린다. 로댕은 마르코타주 스타일로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신체 각 부위를 완벽하게 조합하지 않은 상태의 조각 역시 완결성을 지닐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머리와 팔이 잘려 나간 조각인 ‘걷는 사람’(1877-1878)과 같이 불완전한 인체 형상을 한 경우에도 독자적인 조각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로댕 이후의 현대 조각에서는 신체의 일부를 삭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인체 자체를 점차 추상화해 나가는 경우가 많다. 로댕의 조각은 이러한 현대 조각의 특성을 예견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오귀스트 로댕, 걷는 사람, 1877-1878, 파리 로댕미술관 소장.
장식 조각가들은 인물, 동물, 식물 조각을 동일한 형태로 여러 개 만들어 두었다가 여기저기 필요한 곳에 배치하곤 했다. 이런 제작법에 익숙했던 로댕도 하나의 인물상을 복제해 서로 다른 작품에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지옥의 문’이다. 로댕은 188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장식미술관의 정문 제작을 의뢰받고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한 ‘지옥의 문’을 만들게 된다. 6미터가 넘는 거대한 이 문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전에 제작한 작품을 차용한 것이거나 이후 독립 조각상으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생각하는 사람’(1879-1889)이나 ‘키스’(1882)가 대표적인 예다. 로댕 이전의 전통 조각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종교적, 역사적, 정치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이야기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이야기 서술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인물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통 조각에서는 특정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상이 다른 작품에 다시 등장하면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무너뜨리고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고 여겼다. 이에 비해 로댕은 하나의 인체 조각을 다른 조각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조각이 지닌 서술적인 이야기 구조를 해체해버리게 된다.
로댕의 뫼동 스튜디오 서랍에 보관된 석고 신체 조각들, 파리 로댕미술관 소장.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지옥의 문’을 벗어나 독립적인 조각이 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놓이는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른 맥락을 갖게 된다.

이 작품은 전 세계에 위치한 다양한 공공장소에 설치되어 있다. 대학에 위치한 ‘생각하는 사람’은 지식과 지성을 사유하고, 의회 광장에 설치된 경우는 민주주의를, 묘지에 놓이게 되면 죽음을 사유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로댕의 조각은 더 이상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는 공간의 실제 시간 속에서 자율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현대조각이 지닌 주요한 속성 중 하나다.

로댕의 조각은 이처럼 전통적인 조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는 현대적인 조각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의 조각이 지닌 급진적인 면모를 당대의 모든 사람이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로댕의 작품을 둘러싼 갈등과 의견 대립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로댕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조각가로서의 명성과 부를 모두 누린 흔치 않은 작가이기도 하다.
오귀스트 로댕, 지옥의 문(부분), 1926-1928 캐스팅, 파리 로댕미술관 소장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1879-1889, 파리 로댕미술관 소장.
파리에 위치한 로댕 미술관도 그가 말년에 직접 미술관 설립 계획을 세운 뒤 국가에 운영을 맡아줄 것을 제안하면서 만들어졌다. 로댕은 미술관을 위해 자신의 집과 작품, 저작권을 모두 기증했고, 그의 사망 후 2년이 지난 1919년 개관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로댕 미술관은 고풍스러운 저택과 그 안을 가득 채운 다양한 조각 작품으로도 유명하지만, 꽃과 나무가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2024년 9월부터 로댕 미술관에서는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영어, 프랑스어 등에 이어 한국어가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가 제공되는 7번째 언어라고 하는데, 한국 관객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라 할 수 있다.

총 73개에 해당하는 로댕의 주요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한국어로 제공한다고 하니, 로댕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면 이 서비스를 활용해 봐도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로댕의 작품을 원작으로 볼 기회가 있다. 세종시에 위치한 베어트리파크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전시되어 있다. 로댕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발자크상’(1892-1897)은 남양주에 위치한 모란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로댕의 작품이 오늘날의 한국이라는 시공간과 더불어 어떻게 공명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현대조각의 아버지 로댕과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로댕 미술관 전경.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