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검'에 쓰였던 '이것', 자동차 배터리 시장 흔든다 [원자재 이슈탐구]

불 안나는 바나듐 배터리 신기술 연구 활기
ESS용 바나듐플로 배터리는 양산 단계
미국 중국, 앞다퉈 공급망 확보 경쟁
러시아 스콜코보 과학기술원(스콜텍) 에너지과학기술센터의 개발중인 리튬이온 배터리. 이 센터는 바나듐 함유 양극재 생산 기술, 나트륨 이온 배터리 용 탄소 음극재 및 조립 기술 등을 연구한다./사진=TASS
희귀 금속 '바나듐'(원자번호 23)이 2차전지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 떠오르고 있다. 바나듐을 사용한 배터리는 불이 잘 붙지 않는다. 다만 현재 바나듐 전지의 대표 유형인 바나듐레독스플로우 배터리(VRFB·바나듐흐름 전지)는 부피가 커 차량용으로는 사용되진 않고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바나듐을 리튬 이온 배터리의 양극재로 쓰는 새로운 유형의 배터리 개발에 성공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전기차의 화재 안전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차량용 바나듐 베터리가 실용화된다면 관련 시장이 크게 요동칠 전망이다.

바나듐은 북유럽 신화의 사랑의 여신 바나디스(Vanadis)의 이름을 따왔으며 과거엔 철강재의 강도를 높이는 용도로 주요 사용됐다. 소량만 첨가해도 강철의 강도가 대폭 상승하기 때문에 20세기 초반 포드 자동차 제조에도 쓰였다. 1톤(t)에 강철에 바나듐 2파운드(0.9㎏)만 첨가해도 강도가 두 배로 향상된다. 중세 시대 '악마가 만든 칼'로 불린 다마스쿠스 검을 현대 과학자들이 분석해보니 제련 과정에서 소량의 바나듐이 들어간 덕분에 강력했던 것이었다.

바나듐 자동차 배터리 개발 조짐

29일 광업 전문 매체 마이닝닷컴에 따르면 미국 스타트업 퓨어리튬은 최근 니켈과 코발트 대신 바나듐을 사용하는 독특한 리튬 금속 배터리를 발명했다고 발표했다. 전기차에 쓰이는 기존 리튬·인산철(LFP)나 니켈·코발트·망간(NCM) 배터리와 달리 바나듐 산화물 음극과 리튬 금속 양극을 결합해 만드는 방식이다. 보스턴에 본사를 둔 퓨어리튬은 7월에 배터리용 리튬 금속 전극으로 세계재료포럼(WMF)에서 스타트업 특별상(Start Up Coup de Coeur Award)을 수상하기도 했다.

회사 측은 노벨상 수상자 스탠리 휘팅엄 뉴욕대 화학과 석좌교수가 발명한 바나듐 전극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에밀리 보도인 퓨어리튬 최고경영자(CEO)는 "바나듐 리튬 화합물은 온도 변화에 안정적이며 산소를 방출하지도 않아 LFP배터리보다 낫다"며 "바나듐은 리튬에 맞아떨어지는 새로운 양극재 화학물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나듐 배터리의 본격 양산이 이뤄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불이 나지 않는 배터리 생산이 가능해진다면 업계 판도를 바꿀 전망이다. 다만 차량에 쓰일만한 배터리 품질과 용량을 확보하고 양산 수율을 높이는 데는 많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NCM과 LFP 배터리의 경우에도 개발에서 양산까지 10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됐다.
사진=Ivinity energy 홈페이지 캡쳐

대량생산 가까워진 바나듐 배터리 ESS

이미 연구가 많이 진행된 바나듐레독스플로우 배터리(VRFB)는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소의 에너지 저장시설 조성을 위해 대량 생산 채비를 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이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지난 11일 바나듐이온 배터리(VIB)를 내년부터 본격 양산한다고 발표했다. 한화솔루션이 투자한 한국의 VRFB 제조사 에이치투 역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0㎿h(메가와트시)짜리 장주기 ESS 프로젝트를 수주한 데 이어 3월 스페인에도 8.8㎿h 장주기 ESS를 수출하기로 했다.

미국과 중국 기업들도 VRFB 양산을 서두르고 있다. 중국 후난인펑 신에너지(Hunan Yinfeng New Energy)는 내몽골에 대규모 제조 시설을 건립하기 위해 115억 위안(16억3000만달러)을 투자할 계획이다. 중국 기업들은 쓰촨성·산시성 등에도 대규모 생산 시설을 조성할 계획이고, 미국 정부가 무관심한 틈을 타 미국 기업에 투자해 북미에도 생산 시설 건립을 시도하고 있다. 전해질에 바나듐을 혼합한 배터리의 경우 약 70%가 물로 구성돼 화재 위험이 극히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리튬이온 배터리와 같은 대규모 온도 조절 및 방화 시스템이 필요 없다. 배터리를 상하좌우로 쉽게 쌓아 설치할 수 있어 공간 활용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VRFB의 전해질에 사용된 바나듐은 약 97%를 재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VRFB 배터리 제조에 사용된 다른 재료들도 완전히 다시 사용할 수 있어, 배터리가 수명을 다해도 폐기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바나듐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거나 전해질로 재활용될 수 있다.


바나듐 수급은 문제없나

글로벌 시장의 주요 바나듐 공급 기업들은 대부분 옛 공산 진영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 기업과 남아프리카 기업들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 통계에 따르면 바나듐 매장량은 약 1500만t으로 추정되며 중국은 바나듐 매장량이 510만t으로 세계 총매장량의 34%를 차지한다. 지금은 독재 국가들이 공급을 장악하고는 있지만 향후엔 서방 국가들도 생산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은 바나듐의 80%가 철강 첨가제인 페로바나듐으로 소비된다. 군사·항공우주 분야에도 필수적인 금속이다. 티타늄을 바나듐과 함께 철과 혼합해 최대 7만rpm으로 회전하는 터빈과 엔진 등에 사용된다. 앞으로는 배터리 용도의 바나듐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전망이다.
바나듐 합금이 사용된 미 공군 F-35 전투기 / 사진=AFP
바나듐은 미량이지만 세계 모든 대륙에서 60가지 이상의 다양한 광물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도 바나듐이 생산되며, 미국 캐나다 호주 역시 바나듐 생산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유타주의 우라늄 기업 에너지퓨얼이 고순도 바나듐을 생산하며, 캐나다 기업 네바다 바나듐은 미국 네바다주에서 신규 바나듐 광산을 개발하는 '지벨리니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바나듐은 광산에서 채굴하는 것 외에도 다른 광물의 부산물로도 얻을 수 있다. 현재 바나듐은 철강 생산 과정의 부산물로 생산된다. 바나듐은 비산재, 석유 잔류물, 알루미늄 슬래그를 비롯해 일부 원유 정제에 사용된 촉매에서도 뽑아낼 수 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