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의 거장 아르보 패르트의 음반을 추억하는 여러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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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룸 마이알레 이태원에서1984년 어느날, 독일의 음반사 ECM을 세운 만프레드 아이허는 자동차를 몰고 독일에서 스위스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독특한 음악을 들었다. 곧장 차를 돌린 그는 어느 언덕에 멈춰서서 그 음악이 끝날때까지 침묵 속에서 그 음악을 끝까지 감상했다. 정화와 영적인 느낌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후 이 음악의 정보를 찾기 위해 수개월을 헤맸다.
아르보 패르트의 명반 을 듣는다
전시는 10월 27일까지
음악의 제목은 프라트레스(Fratres·형제들),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곡이었다. 패르트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방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머물고 있는 현대음악가였다. 아이허는 "아르보 패르트의 음반은 공간을 찾고 있었다"며 그길로 아르보 패르트의 음반을 만든다. 이 때 나온 앨범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타불라 라사'란 라틴어로 백지, 깨끗한 석판을 의미한다. 인간이 출생 이후에 외부 세상의 감각적 지각활동과 경험으로 서서히 마음이 생기고, 전체적인 지적 능력을 갖춰간다는 개념을 포함하는 말. 서구권 주류 음악의 한복판에 변방의 예술가가 보여준 <타불라 라사>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 평론가들은 음악사의 중요한 변곡점을 이룬 음반이라며 입을 모았고, 패르트의 작곡법이 진리와 아름다움, 순수함에 대한 탐구라며 극찬했다. 세상에 나온지 40년이 된 이 음반을 기리는 전시가 서울 한남동에서 열리고 있다. <타불라 라사>에 담긴 수록곡을 한곡씩 깊이 있게 듣는 특별한 전시다. 음반사 ECM과 전시기획사 UNQP가 협력해 마이알레라는 공간에서 <타불라 라사: 침묵, 그 이전>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었다. 3년전 은퇴를 선언하고 모든 대외 활동을 멈춰버린 아르보 패르트를 추억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지난 26일 이곳을 찾았다. 리빙룸 마이알레는 원래 지난해까지 2층 규모의 단독 주택이었다.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주거 공간을 그대로 살려뒀고 그 공간에 어울리는 수록곡을 들려주고 있었다. 방마다 다른 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재생방식도 진공앰프, 소니의 카세트 테이프, CD, 뱅앤올룹슨의 하이엔드 오디오 등 제각각인게 특징이다.김현석 UNQP 대표는 "한 공간에서 음악을 공유하고 온전히 듣는다는 의미의 딥 리스닝(Deep listening)을 실현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며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명을 최소화하고 아르보 패르트가 했던 말들로만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1층 거실. 진공앰프로 아이허가 들었던 프라트레스를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과 키스 자렛의 피아노로 들을 수 있었다. 전통적 클래식 교육을 받은 크레머와 즉흥 재즈 연주자인 자렛이 한데 어우러진 것에서 패르트 음악의 포용성을 느낄 수 있었다. 거실 바로 옆 주방과 이어진 작은 공간에서는 패르트가 영국의 한 작곡가를 애도하며 지은 곡이 흘러나왔다. 느린 종소리가 세번 울리고 미디어 월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추모와 슬픔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됐다. 2층으로 올라가니 커다란 침대가 놓인 침실이 보였다.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거나 누웠다. 프라트레스의 또 다른 편곡 버전이 CD를 통해 흘러나왔다. 김현석 대표는 "같은 곡이지만 편곡 방식에 따라 아예 다르게 들리는 게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이라며 "공간과 재생 방식도 달라졌기에 더 색다른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침실 옆 서재에서는 패르트의 또다른 유명곡인 '알리나를 위하여(Fur Alina)'가 울려퍼졌다. 놀랍게도 1970년대 판매됐던 소니의 카세트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음악에 더해진 특별한 공간 연출은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차별점이다. 또한 최근 수많은 팝업스토어에서 생겨나는 쓰레기들에 반대하며 모든 구성품을 친환경 소재로 사용했다. 종이와 플라스틱의 중간처럼 느껴지는 질감의 패브릭은 전시가 끝나면 철거해 뭉쳐서 에코백과 굿즈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이번 전시는 밤이라고 문을 닫지 않는다. 낮과 밤 모두 손님을 맞는다.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관람할 수도 있고 도슨트 투어를 선택해 음악과 음악가의 생애, 그가 처했던 배경을 깊이 있게 접할 수도 있다. 음악 감상뿐 아니라 음반 관련 아트워크, 아티스트의 사진, 인터뷰 영상, 멀티미디어 작품 등이 적절히 놓여있어 감상에 도움을 준다. 모든 음악이 끝나니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내가 모든 걸 잃는다 해도…"로 시작하는 패르트의 일기를 비롯해 예술가의 초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Even if I lose everything(2015)'를 담은 미디어 패널 앞에 다시 섰다. 커다란 울림이 마음에 남았다. 전시는 10월 27일까지.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