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4600억 들였는데…" 값싼 중국산 공세에 '초비상'

中에 밀려…소부장 국산화 '물거품' 위기
갈길 먼 '공급망 안정화'

인조흑연·무수불산 국내 생산했지만
보조금 등 지원 없어 중국산과 경쟁 안돼
인조흑연을 비롯해 국산화에 성공한 주요 핵심소재 산업이 정부 보조금을 받는 중국산과의 가격 차이로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의 포항 인조흑연 제조공장에서 담당자가 제조 공정을 점검하고 있다. 포스코퓨처엠 제공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 요소수 대란 등 공급망 위기를 계기로 정부가 185개 핵심 소재의 국산화에 나섰지만 애써 국산화한 소재가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중국산과 가격 차가 벌어지면서 한국 대기업이 국산 대신 값싼 중국 소재를 찾고 있어서다. 핵심 소재들이 단순히 국산화를 넘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작비 보조, 세제 지원 확대, 납품 대금 결제 연장 지원 같은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의 인조흑연 음극재(원안). 포스코퓨처엠 제공
29일 산업통상자원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포스코퓨처엠은 4600억원을 투자해 올 4월부터 2차전지 핵심 소재인 인조흑연을 생산했지만 LG에너지솔루션 등 국내 배터리 3사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반도체 소재인 불화수소의 원료인 무수불산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후성도 비슷한 이유로 공장 가동률이 약 40% 떨어졌다.

인조흑연과 불화수소는 둘 다 중국 의존도가 90%에 달해 공급망 안정화가 시급한 소재다. 흑연은 지난해 중국의 수출 통제로, 불화수소는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로 국내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국내 업체들이 국산화에 나섰다.

작년 말 산업부는 이들을 포함해 국민 생활과 첨단산업에 필수적이면서 단일 국가 의존도가 50%를 넘는 185개 소재를 공급망 안정화 품목으로 선정했다. 5년간 11조5000억원을 투자해 2022년 70%인 185개 소재의 수입 의존도를 50% 이하로 낮춘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상당수는 인조흑연이나 불화수소처럼 중국산에 밀려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애써 국산화한 소재가 국내 대기업에서 외면받는 이유는 중국산과의 가격 격차다. 국산화 소재는 중국 경쟁 제품보다 적게는 30~40%, 많게는 배 수준으로 비싼 경우가 일반적이다. 중국의 자원 수출 규제로 우리 기업의 원재료 부담은 커진 반면 중국산 경쟁 제품 가격은 오히려 떨어진 탓이다. 중국 정부가 소재산업을 키우기 위해 자국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한 결과란 게 업계의 설명이다.

보조금 못받고 추가 가공비 들어…포스코퓨처엠 제품 70~80% 비싸
수출규제·요소수 대란 잊었나…줄었던 中요소 의존도 90% 넘어

지난 4월 경북 포항 포스코퓨처엠의 인조흑연 공장이 가동을 시작했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지만 중국에 90%를 의존하고 있는 흑연의 ‘탈(脫)중국’이 본격 추진되는 순간이었다. 포스코퓨처엠은 1만3000t 규모의 인조흑연 공장 건설에 4600억원을 들였고, 산업통상자원부도 50억원을 지원했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난 현재 인조흑연 사업은 순조롭지 않은 상황이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구매를 주저하고 있어서다. 포스코퓨처엠은 급한 대로 8000t만 인조흑연을 생산해 미국 배터리 제조사 얼티엄셀즈에 납품하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은 2026년까지 인조흑연 생산능력을 3만8000t으로 늘릴 계획이었지만 최종 의사결정을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원재료값 인상·中 보조금 ‘2중고’

포스코퓨처엠은 인조흑연을 생산하기 전부터 천연흑연을 제조해왔다. 포스코퓨처엠의 천연흑연은 현재 ㎏당 4달러 초반대지만 중국산 천연흑연은 2.9달러다. 중국이 천연흑연의 원료인 구형 흑연 수출을 통제하는 동시에 자국 흑연업체에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가격 차가 크게 벌어졌다.포스코퓨처엠이 인조흑연 생산에 나선 것은 중국에 전량 수입을 의존하는 구형 흑연 대신 제철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공 비용에 전기요금 등이 추가되기 때문에 포스코퓨처엠이 만드는 인조흑연 가격은 천연흑연보다도 약 30% 더 비싸다. 국내 배터리 대기업이 중국산 대신 국산 흑연을 써주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가격 차이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국산화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불화수소도 실상은 비슷하다. 2019년 7월 일본의 수출 통제 이후 한국 정부와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 의존도를 낮추는 데 사활을 걸었다. 그 결과 솔브레인 같은 한국 기업은 불화수소 국산화에 성공했다. 국내 불화수소 시장을 이제는 국내 기업들이 70%가량 점유하고 있다.

문제는 원재료 공급망이다. 불화수소는 형석을 가공한 무수불산으로 만드는데, 형석과 무수불산 모두 중국이 최대 생산국이다. 국내 무수불산 수요는 연간 7만t이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후성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연 9000t의 무수불산을 생산해 중국의 시장 독점을 겨우 막고 있다.

반도체 수요 증가로 국내 무수불산 수요는 곧 10만t을 넘길 전망이다. 2030년까지 중국산 의존도를 50% 이하로 낮추려는 정부 목표를 달성하려면 후성은 생산량을 5만t으로 늘려야 한다. 현실은 저가 중국산에 밀려 생산 중단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美·日은 中에 맞서 보조금 지급

2021년 중국발 요소수 대란을 계기로 공급망을 다변화한 차량용 요소도 다시금 중국에 종속됐다. 한국은 수입처를 다변화해 중국산 요소 의존도를 2021년 83.4%에서 2022년 71.7%로 낮췄지만 지난해 중국산 의존도는 다시 90%를 넘었다. 요소수를 구매하는 국내 기업들이 가격이 싼 중국산만 찾은 결과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공급망 안정화 품목으로 정한 185개 소재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산 등과의 가격 차가 워낙 크다보니 단기 실적을 따져야 하는 국내 대기업들이 선뜻 국산을 선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산화, 다변화, 비축 등 공급 안정화에 집중된 핵심 소재 정책의 무게중심을 가격경쟁력 확보 등 수요 부문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작비 보조, 세제 지원 확대, 납품대금 결제 연장 지원 등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일각에선 세액공제는 공장 가동 후 이익이 발생해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한계가 있는 만큼 곧바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미국 일본 인도 등도 중국의 노골적인 자원 수출규제와 자국산업 보호에 맞서 보조금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보다 훨씬 적은 수준의 보조금만으로도 185개 핵심 소재를 전부 안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영효/이슬기/황정환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