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표 ‘웰메이드’가 첫 출항… ‘영화의 바다’로 닻 올린 BIFF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넷플릭스 영화 ‘전, 란’ 개막작 선봬

‘대중성’에 초점 맞춘 프로그램 등 눈길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을 앞둔 2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시민이 포스터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에 있지만, 영화가 없어지는 일을 없을 겁니다.” (김상만 영화 ‘전, 란’ 감독)

아시아 최대 영화축제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2일 스물아홉 번째 막을 올렸다. 이날 부산 해운대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개막식을 진행한 BIFF는 오는 11일까지 열흘 간 부산 시내 7개 극장, 28개 스크린에서 63개국 영화 224편을 상영하며 전 세계 시네필(Cinephile·영화 애호가)들을 맞이한다. 올해 BIFF의 포문은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전, 란’이 열었다. ‘극장의 위기’를 넘어 ‘영화의 위기’까지 거론되는 시점에서 넷플릭스에 공개될 OTT 영화를 영화제 얼굴로 내세운 파격이다. 그간 스크린을 통해 시대가 바뀌는 과정을 짚어온 BIFF가 3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직접 시대 변화에 앞장서겠다는 의지가 담긴 결정이다. 극장, OTT로 영화의 가치를 구분하는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든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영화’ 자체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전, 란' 스틸. /BIFF
BIFF 포문 연 ‘전, 란’, 박찬욱 색깔 듬뿍 담은 ‘웰메이드’

이날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전, 란’은 대중성은 물론 작품성 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임진왜란과 신분갈등이라는 다소 뻔한 재료지만, 거장 박찬욱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아 맛을 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지러운 전란 속에서 양반의 아들 종려(박정민 분)와 몸종 천영(강동원 분)이 빚는 오해와 갈등을 그린다. 배부른 양반과 굶주린 노비,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왕의 측근과 맞서 싸우는 의병 등 영화 내내 이분적 대비가 드러나는 대결 국면이 영화의 전체적인 얼개다.

영화 ‘군도’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등 비슷한 시대를 다룬 영화들에서 흔히 봤던 구도지만, 전개가 좀 더 박력 있다.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양반 종려와 신분 상승을 위해 의병 활동에 몰두하는 천영, ‘코 베는 귀신’으로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가 살기 위해 항복한 왜장 겐신(정성일 분)이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뒤엉켜 칼을 섞는 장면은 그간 비슷한 소재의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입체적인 장면이다.
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열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인 넷플릭스 영화 '전, 란' 기자회견에서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상만 감독,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연합
박찬욱표 영화답게 디테일도 살아있다. 숨기지 않고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유머 코드가 몰입을 해치지 않는 점이 그렇다. 천영이 ‘장원 급제’를 말할 때 ‘장’자를 장음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모습도 재밌는데, 직접 박찬욱 감독이 강동원에게 정확한 발음을 조언해 나온 결과다.“좋은 영화란…” 넷플릭스 ‘전, 란’이 BIFF와 조응한 이유

앞서 BIFF 측은 ‘전, 란’을 개막작으로 선정하며 “얼마나 좋은 영화이고, 관객이 즐길 수 있을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대중성이 담보된다면 OTT 개봉작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다. 일각에서 가뜩이나 극장을 찾는 관람객이 줄어드는 와중에 과열된 넷플릭스 쏠림 현상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BIFF는 소비 방식이나 관람 장소에 구애 받는 대신,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간 BIFF의 개막작은 관객의 취향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가 최근 개봉했지만, 관객을 6만여 명 동원하는 데 그친 게 대표적. 박도신 BIFF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은 이날 시사 직후 이뤄진 기자간담회에서 “지금까지 BIFF는 완성도 높은 독립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했고, 그 기조가 변하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전, 란’은 완성도가 높은 영화라 꼭 소개하고 싶었고, 해볼 만한 모험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2일 개막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을 앞둔 2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의 모습. /유승목 기자
‘전, 란’을 연출한 김상만 감독은 “넷플릭스 작품이 영화제에 오를 때마다 논란이 있었지만, 이제 그 논란에 질문을 던져야 할 때”라며 “스크린 사이즈로만 영화를 얘기하는 대신 높은 퀄리티와 기술, 새로운 형식의 표현 등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했다. 배우 김신록은 “영화가 190개국에서 넷플릭스로 공개된다”며 “여러 나라에서 영화를 사랑해준다면 그 힘이 스크린으로도 이어지고 극장용 영화까지 힘을 얻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결국은 ‘대중성’ 관객 친화에 초점

이번 영화제를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대중성’이다. 방탄소년단(BTS) RM의 다큐멘터리인 ‘알엠: 라이트 피플, 롱 플레이스’가 ‘오픈시네마’ 부문에 초청돼 야외극장에서 상영되는 게 대표적이다. 또 한국과 아시아 지역 다큐멘터리 영화를 알리는 차원에서 관객들이 직접 우수한 작품을 투표로 뽑는 ‘다큐멘터리 관객상’도 신설했다.

김영덕 BIFF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은 “관객과 대중의 관심이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했다”고 했다. 영화 ‘고독한 미식가 더 무비’의 일본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 일본 거장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등 국내 영화 애호가들에게도 익숙한 인기 영화인들도 대거 부산을 찾는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을 앞둔 2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시민들이 영화제 굿즈(상품)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관객 친화형 영화제’를 표방한 효과는 일찌감치 드러나고 있다. 전날 부산 남포동 BIFF 광장서 전야제 행사부터 크게 흥행했다. 엄숙한 분위기 대신 젊은 세대에서 좋아하는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을 한껏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개그맨 윤성호가 승복을 입은 뉴진스님으로 DJ를 맡아 노래를 틀자 관객들은 물론 길을 걷던 시민들도 합세하며 클럽 분위기를 자아냈다.

부산=유승목/최다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