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혁신 선순환의 조건

이정호 중소기업부장
고래는 한때 인류의 중요한 에너지 자원이었다. 고래 몸속에서 나온 기름은 태울 때 냄새와 그을음이 덜해 18~19세기 미국과 유럽에서 어둠을 밝히는 램프 연료로 사용됐다. 당연히 고래를 잡는 포경산업에 돈이 몰렸다. 대규모 포경 선단을 꾸리기 위해 자본가는 물론 일반 시민의 투자까지 받았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3~4년의 험난한 항해가 끝나면 결과물로 수익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모험투자가 기본인 벤처캐피털(VC)의 시초였던 셈이다.

19세기 초 고래기름 수요가 늘면서 포경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노련한 선원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임금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고래기름 가격을 끌어올렸다. 연간 8만여 마리의 고래가 남획돼 유한 자원의 고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일상화한 구조 변화 대비해야

복합적인 문제가 터져 나오던 그때 처음 개발된 게 석유 증류 기술이다. 원유에서 추출한 값싼 등유는 고래기름의 대체재가 됐다. 때마침 미국 동부에서 인공적인 석유시추 사업이 시작돼 안정적인 공급을 뒷받침했다. 100년 넘게 이어진 포경산업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포경산업의 급속한 몰락과 석유산업의 부상은 산업사(史)의 중요한 구조적 변화 장면 중 하나다. 기술 발전과 이로 인한 대체 산업군의 등장, 새로운 시장의 출현은 정상적인 산업 생태계에 작동하는 혁신 시스템이다. 혁신은 기존의 틀을 깨고 신기술과 효율적인 생산 방식을 이끌어내 다층적 부가가치 창출의 토대를 만든다. 차별화된 기술력이 쌓아 올린 탄탄한 기술 진입 장벽은 생존 경쟁력의 밑거름이 된다. 4차 산업혁명과 맞물려 진행되는 디지털 전환(DX)의 물결 속에서 구조적 변화는 이미 일상화된 상수다. 혁신이 이뤄낸 시대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되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미래 성장틀 닦는 파괴적 혁신

영원할 것 같던 인텔 왕국의 쇠퇴도 이 같은 구조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패착의 결과다. PC 중심에서 모바일로의 전환, 개방형 분업 구조인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의 성장, 폭풍처럼 불어닥친 인공지능(AI) 열풍의 성패 갈림길에서 뒤처져 차츰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종에서 밀려났다. ‘인텔 인사이드’로 구축한 30년의 영광에 취해 생산 효율 증대에만 천착하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혁신을 게을리했다는 지적이다.물론 혁신적인 사업 구조 전환과 신사업 진출로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기업도 있다. MS는 PC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벗어나 클라우드로 새 성장엔진을 달았다. 소니는 전자산업 비중을 줄이고 게임과 음악, 영화 등 문화사업 위주로 방향타를 꺾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혁신은 산업 생태계에 잠재된 구조적 변화를 자극하는 원동력이다. 혁신 시도의 성공·실패 과정에서 새 시장이 창출되고 결과적으로 정체 상태의 경제는 다시 성장 궤도에 들어선다. 산업 생태계 전체의 후속·모방 투자를 자극해 또 다른 혁신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혁신의 선순환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진보와 맞닿는다. 파괴적 혁신은 정해진 틀과 방식이 없다. 결국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창조적 기업가들이 이끌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의 시대, 끊임없이 기업가정신을 독려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