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시장 개방 막자, 되레 수입만 늘어…매년 보관비용만 혈세 4000억
입력
수정
지면A3
20년 '쌀퓰리즘'…벼농가 눈치보며 개방 미룬 '부메랑'한국은 쌀이 남아도는 나라다. 3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현재 정부가 비축(보관)한 쌀 재고 물량은 약 115만t에 달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권고한 한국의 적정 비축 물량인 80만t보다 43% 많다. 소비량은 빠르게 줄어드는데 생산량 감소는 더뎌 국산 쌀도 남아도는 상황에서 수입 물량까지 더해진 결과다.
1995년·2005년 두차례 유예
매년 의무수입물량 40만t 달해
남는 물량은 국내산과 함께 보관
쌀풍년에 연말 재고 140만t 전망
내년 보관비 4561억…11% 급증
전문가 "포퓰리즘이 농업 망쳐"
○개방 미룬 대가로 수입쿼터 급증
이런 악순환은 1995년 시작됐다. 한국은 당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농산물 시장을 개방(관세화)했지만 쌀 시장만큼은 유예했다. 국내 농업계 대다수를 차지하는 쌀 농가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쌀은 식량안보를 지킨다는 명분도 가세했다. 쌀 개방은 2004년 한 번 더 유예돼 20년간 미뤄졌다.쌀 시장 개방 유예는 ‘공짜’가 아니었다. 정부는 쌀 시장 개방을 미루는 대가로 일정 물량을 5%의 낮은 관세율로 수입하는 저율관세할당(TRQ) 방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TRQ 물량은 1995년 5만1307t에서 2004년 20만5229t, 2014년 40만8700t으로 계속 늘어났다. 2015년 마침내 쌀 시장이 개방되면서 수입 관세율이 513%로 높게 설정됐지만, TRQ 물량인 40만8700t에는 5% 관세가 그대로 유지됐다.
쌀 수입은 국영무역으로 이뤄진다. 정부가 미국 중국 등 수출 쿼터(할당)를 가진 국가에서 최저가로 쌀을 사들인 뒤 가장 높은 가격으로 입찰한 국내 업체에 되파는 방식이다. 수입쌀은 즉석밥 떡볶이 등 쌀 가공식품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쓰인다. CJ제일제당이 미국에 수출하는 햇반에도 미국산 쌀이 들어간다. 수입쌀은 주정용, 사료용으로도 많이 활용된다. 하지만 밥쌀용으로 판매된 수입쌀은 지난해 기준으로 6000t(1.3%)에 불과했다.수입쌀도 모두 팔리지 않는다. 판매되지 않은 수입쌀은 국산쌀처럼 비축된다. 지난 8월 기준 수입쌀 비축량은 32만t이다. 국내 전체 비축량의 28%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정부는 국산 쌀과 수입한 쌀을 보관하면서 매년 정부양곡 관리비 명목으로 수천억원을 쓴다. 최근 5년간 양곡관리비는 1조9594억원에 달했다. 농식품부는 내년 정부양곡 관리비 예산으로 올해(4091억원)보다 11.5% 늘어난 4561억원을 책정했다.
○올해도 ‘원치 않는 풍년’ 들 듯
이런 상황을 놓고 농업계에서도 “농가 눈치를 보면서 개방을 미루다 쌀 시장을 망쳤다”는 비판이 나온다. 개방을 앞당겨 TRQ를 최소화했어야 국내 쌀 공급과잉이 해소되고 쌀 시장 왜곡도 줄었을 것이란 지적이다. 정황근 전 농식품부 장관이 작년 5월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2004년 쌀 시장 개방을 미룰 때 누군가 목숨 걸고 막았어야 했다”고 말한 이유다.쌀 공급과잉 사태는 올해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올해는 별다른 풍수해가 없고 일조량도 많아 쌀 풍년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쌀 풍년이 들면 재고량이 연말에 140만t까지 치솟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 내부에서 “요즘은 풍년이 오더라도 기쁘지 않고 오히려 걱정만 커진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농식품부는 올해 밥쌀 재배면적 2만㏊ 수확분을 시장에서 사전에 격리하고 필요에 따라 추가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정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추진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야당은 쌀값이 폭락했을 때 정부가 초과 생산된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내용의 양곡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법안이 개정될 경우 쌀 생산량이 더 늘어 공급과잉 상황이 심화할 것으로 정부는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지방자치단체별로 벼 재배면적 감축량을 할당해 쌀 생산량을 줄이는 작업에 나설 방침이다. 협조하지 않는 농가엔 페널티를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쌀 농가가 콩 등 대체 작물을 재배하면 보조금을 주는 전략작물직불제도 강화하기로 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