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저 ‘발가벗은 힘’을 [고두현의 아침 시편]

참나무
앨프리드 테니슨

젊거나 늙거나
저기 저 참나무같이
네 삶을 살아라.
봄에는 싱싱한
황금빛으로 빛나며여름에는 무성하고
그리고, 그러고 나서
가을이 오면 다시
더욱 더 맑은
황금빛이 되고

마침내 잎사귀
모두 떨어지면
보라, 줄기와 가지로
나목 되어 선
저 발가벗은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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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초입에서 한 그루 참나무를 떠올립니다. 나목의 ‘발가벗은 힘’을 생각합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국보적 존재로 추앙받았던 영국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 그가 참나무 앞에서 생의 사계절과 인간의 근본을 노래했습니다.

봄 여름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나무의 몸이 가을날 ‘더욱 더 맑은’ 빛을 뿜어내는 이유와 ‘마침내 잎사귀/ 모두 떨어지면’ 줄기와 가지만으로 더욱 굳건해지는 이치….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믿음은 ‘줄기와 가지로/ 나목 되어 선/ 저 발가벗은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경영철학자 윤석철 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입니다. 그는 정년퇴임 고별강연에서 이 시를 인용하며 “개인과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참나무처럼 ‘발가벗은 힘’(naked strength, 나력·裸力)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에서 ‘발가벗은 힘’은 일정 지위나 상황 때문에 만들어지는 힘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내재해 있어서 일정 기간이 흐른 후에도 유지되는 힘을 말하지요. 그는 두 가지 사례로 링컨의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이 비록 2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우리에게 회자되는 것과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가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축하 행사용으로 작곡됐으나 작품 자체의 ‘나력’으로 불후의 명곡이 된 사실을 들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기업을 키우려는 생각은 나력을 이해하지 못한 경영철학”이라며 자신의 이론인 ‘생존 부등식’을 상기시켰습니다.

기업의 경우 소비자가 느끼는 가치(v)가 가격(p)보다 더 큰 제품,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가치에서 가격을 뺀 크기(v-p)가 ‘발가벗은 힘’이며, 소비자들이 제품의 가치(v)가 가격(p)보다 크다고 느끼는 한 그 기업은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에 나오듯이 ‘마침내 잎사귀/ 모두 떨어지면(All his leaves/ Fall’n at length)’의 상황에서도 버텨낼 수 있는 ‘발가벗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옷을 벗고 보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남아 있는 힘 즉, 존경, 실력, 인격 등이 바로 ‘발가벗은 힘’이라면서 인간적인 아름다움, 자기희생, 헌신적 생활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날 이후 다른 강연에서도 그는 ‘참나무’를 즐겨 인용했습니다. 그가 예로 든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 얘기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드골은 독일보다 땅이 넓고 인구도 많은 프랑스가 전쟁만 하면 독일에 번번이 지는 걸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드골은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미래지향적 정책을 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드골은 결국 하야하고 말았습니다.

드골은 죽을 때 유언으로 국장(國葬)을 거부했고, 묘비에 ‘전직 대통령’이라는 구절도 넣지 못하게 했습니다. 부인인 이본 드골 역시 대통령 배우자에게 나오는 연금을 사양했습니다. 드골의 인기는 사후에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이본 여사가 죽자 프랑스 국민은 드골에게 ‘프랑스 대통령’이란 문구를 새긴 묘비를 헌정했습니다. 지금도 드골은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꼽힙니다. 드골이 대통령이라는 ‘옷’을 벗은 후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발가벗은 힘’ 덕분이었습니다.

‘벌거벗은 힘’은 우리의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이지요. 윤 교수의 말처럼 우리가 젊어서 누리는 육체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벗어야 하는 ‘옷’이고, 권세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옷’입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헛된 환상, 탐욕, 유혹에서 깨어나야 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내면의 ‘벌거벗은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참나무’의 시인 테니슨도 그랬습니다. 그는 조숙해서 5세 때부터 시를 썼고 18세에 형과 함께 형제 시집을 낼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재주에만 의존하지 않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총장상 메달을 받을 정도로 노력을 거듭하며 실력을 키웠지요. 35세 때는 그의 시를 열렬히 좋아하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테니슨 경이 되는 영예마저 누렸습니다. 이후 83세로 죽을 때까지 영국 국민의 존경을 받았고 영예로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습니다. 이 모든 게 스스로 단련한 ‘발가벗은 힘’ 덕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