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노가 이끈 런던 심포니…환상적인 명연으로 청중을 압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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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우리는 한국에서, 이 멋진 콘서트홀을 비롯한 여러 공연장에서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파파노 지휘, 유자 왕 협연
이탈리아계 영국 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가 앙코르 연주에 앞서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된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세 번째 무대에서의 일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 감사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런던 심포니가 이번 무대에서 역대 내한공연 최고 수준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2부에서 연주한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은 환상적인 명연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악단의 새로운 수장, 안토니오 파파노가 있었다.런던 심포니는 지난해 전임 음악감독 사이먼 래틀을 떠나보내고 올해 안토니오 파파노를 새 상임지휘자로 맞아들였다. 당초 이 교체 소식은 다소 뜻밖이라는 반응도 낳았었다. 파파노는 2002년부터 올해 5월까지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으로 장기 재임하면서 우리 시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각광받아왔고, 그만큼 ‘오페라 지휘자’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파파노는 2005년부터 2023년까지 로마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하는 등 ‘콘서트 지휘자’로서의 역량과 입지도 꾸준히 다져온 인물이다. 특히 런던 심포니와는 1996년 데뷔 이래 최근까지 70여 차례 지휘봉을 들었을 만큼 끈끈한 인연을 이어왔다. 파파노의 런던 심포니로의 이적은 그의 경력에서, 그리고 악단의 이력에서 중대한 분수령으로 평가받을 일이고, 이번 내한공연은 이제 막 출범한 그들의 파트너십의 향후 성패를 가늠할 귀중한 기회라 하겠다.
지난 3일 공연에서 파파노와 런던 심포니는 기대 이상으로 긴밀하게 다져진 파트너십과 원숙한 음악성을 드러내 보였다. 파파노는 콘서트 지휘자로서 무르익은 역량과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강점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노련한 지휘봉으로 공연을 이끌었고, 런던 심포니 단원들은 그의 지휘봉에 능숙하게 반응하며 자신들의 저력을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이날 공연 프로그램은 협주곡을 제외하면 앙코르까지 프랑스 레퍼토리로 일관했다. 1부는 베를리오즈의 인기 서곡 ‘로마의 사육제’로 출발했다. 어느 한 파트 ‘구멍’ 없이 모든 단원이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런던 심포니의 준수한 합주력은 첫 곡부터 흔들림이 없었다. 프랑스 악단처럼 화려한 색채감을 자유롭게 발산하는 연주는 아니었지만, 대신 영국 대표 교향악단 특유의 견실한 앙상블과 중후한 사운드가 사뭇 정연하면서도 충분히 생동감 있게 펼쳐졌다.동시에 새 수장 파파노의 존재감과 단원들에 대한 신뢰가 강하게 감지되는 연주이기도 했는데, 그는 예상보다 차분한 템포로 안정적인 흐름을 이끌어가면서 앙상블 전체의 밸런스와 특히 ‘노래의 호흡’을 중시했다. 곡 첫머리에 나오는 잉글리시혼 솔로가 부각될 때는 오페라 가수의 노래를 반주하듯 나머지 악기들을 세심히 단속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칸타빌레(노래하듯이 연주함)를 빚어내며 연주를 풍부한 양감과 여유로운 열정으로 채워나갔다. 전임자인 사이먼 래틀 때와 비교하자면, 래틀의 런던 심포니가 리듬감과 활력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면, 파파노의 런던 심포니는 선율미와 기품이 보다 두드러지는 형국이었다.
다음 곡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에서는 중국 출신의 스타 피아니스트 유자 왕이 협연자로 나섰다. 유자 왕은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예의 경쾌한 테크닉과 적재적소에서 터뜨리는 강단 있는 악센트, 개성적인 표현력과 매력적인 시정을 별다른 부족감 없이 펼쳐 보이며 이름값을 했다.아울러 파파노가 조율한 관현악도 무척 돋보였는데, 그는 오케스트라에서 이례적으로 충실하고 풍부한 음악을 이끌어내 흡사 ‘교향적 협주곡’을 방불케 하는 모습을 부각하는가 하면, 필요한 대목에서는 악단의 음량을 주도면밀하게 제어하여 협연자를 효과적으로 배려했다. 과연 탁월한 오페라 지휘자이자 성악 반주자다운 모습이었다. 유자 왕은 세 곡의 앙코르를 들려줬는데, 그중 고유의 아련한 정서에 모종의 충동이 돌출된 첫 곡(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과 기민한 테크닉이 돋보인 끝 곡(시벨리우스의 ‘에튀드 제2번’)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2부에서 연주된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은 그동안 필자가 접해본 실연 중 최고였다. 파파노는 다시금 차분한 템포와 치밀하고도 유연한 지시, 특유의 선율 감각으로 연주를 이끌어갔고, 런던 심포니 단원들은 그의 지휘봉에 충실하면서도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조화로운 밸런스 속에서 정중한 감흥이 피어오르는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악곡의 섬세한 텍스처와 다양한 색채, 폴리포니의 다층적인 레이어가 오롯이, 더없이 자연스럽게 살아났다. 게다가 악단과 함께 내한한 오르가니스트 리처드 가워스(Richard Gowers)가 담당한 오르간 연주와의 밸런스까지 완벽해서 그야말로 최상급의 명연이 탄생했다.롯데콘서트홀의 자랑인 리거 파이프오르간은 근래 들어 무르익은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데, 지난 6월의 벤 판 우스텐 오르간 리사이틀에 이어 이번에도 잘 영근 소리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1악장 후반부, 일반적인 교향곡의 느린 악장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무대 후면의 오르간이 다채로운 음색으로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무대 위 오케스트라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던 장면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커튼콜. 파파노는 모두에 언급한 감사 인사를 건넨 후 가브리엘 포레의 ‘파반’을 앙코르로 선사했다. 절제미와 격조가 두드러진 그 연주는 올해 서거 100주기를 맞이한 작곡가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는 듯했다.
끝으로 덧붙이자면, 지난 2018년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통해서 파파노를 만났던 분들께는 그때보다 한층 성숙하고 발전한 ‘진정한 거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고 귀띔하고 싶다. 아울러 세계 최정상급으로 정평이 난 런던 심포니의 합주력도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고 우아한 풍미로 가득했다.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