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오페라의 자존심, 유럽판 함진아비 이야기 <장미의 기사>

슈트라우스 3대 걸작 중 최고 인기오페라

중세유럽 귀족들의 삶 풍자한 희가극
1911년 초연 당시 베를린 - 드레스덴 간 임시 열차 운행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총 36일간 5편 오페라 공연
올해로 21회째를 맞은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지난 4일부터 이틀간의 일정으로 개막했다. 올해 개막작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였다. 이 작품이 국내 무대에 오른건 1996년 서울시오페라단의 국내 초연 이후 28년만이다.

슈트라우스는 바그너와 더불어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으로 불릴만큼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 받는 오페라 작곡가지만 그들의 작품은 좀처럼 국내에서 볼 기회가 드물다. 제작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3시간동안 공연되는 3막 오페라 내내 발음이 어려운 독일어 레치타티보(음이 있는 대사)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성악가를 찾기도 어려운데다 작곡가의 작품 특성인 빠른 극적 전개와 속도감 넘치는 관현악 진행에 맞춰 관객의 빠른 이해와 공감을 끌어내야 하는 수준 높은 연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911년 드레스덴 젬퍼오퍼에서 초연된 <장미의 기사>는 전작인 <살로메>와 <엘렉트라>가 파격적인 소재와 불협화음으로 이목을 끌어 성공한 것에 한계를 느낀 슈트라우스가 귀에 편한 조성음악으로 써낸 오페라다. 작곡가가 대본가에게 구체적인 대본 콘셉트를 요구해 만들어낸 일화로도 유명하다. 슈트라우스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1874-1949)을 찾아가 '모차르트의 희극 같은 밝은 느낌의 대본'을 써달라며 제안했고 호프만스탈의 대본으로 완성된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의 최대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합스부르크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재위기간(1745-1765)의 오스트리아 빈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는 작품의 흥행을 위해 가미된 시·공간적 허구 요소들이 있다. '장미의 기사'는 창과 방패를 든 기사가 아니라 결혼할 신부의 집에 청혼의 선물로 은장미를 배달하는 유럽의 '함진애비'다. 그런데 이 풍습은 작품의 배경인 18세기 오스트리아 빈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본을 쓴 호프만스탈이 작품의 성공을 위해 서민들이 알 수 없었던 귀족간의 혼인 문화가 있었던것처럼 만들어낸 이야기다. 1막 후반부 은장미를 들고 떠나려는 옥타비안에게 하는 마샬린의 대사 중 '프라터에서 다시 만나자'는 내용이 있다. 프라터는 1897년 개관한 빈의 2구 레오폴트슈타트(Leopoldstadt)에 있는 놀이공원이다. 2막의 옥스 남작이 어린 신부를 탐하는 야한 내용으로 부르는 '내가 없으면 (Ohne mich mit mir)'은 왈츠 풍으로 작곡돼 오페라의 배경이 빈이라는 것에 무게를 싣어주지만 실제로 빈에서 왈츠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다.

작품의 1막은 마샬린과 옥타비안 백작이 한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시작된다. 마샬린의 사촌 옥스 남작이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리기 위해 찾아오기 전까지 달콤한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극중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마샬린을 찾아와 자신들을 소개하고 인사를 건네는데 이것은 실제 18세기 귀족들의 삶을 반영한 것이다. 이탈리안 테너가 등장해 '내 가슴은 견고하게 무장한 채 사랑을 거부했네 (Di rigori armato il seno)를 노래한다. 이 장면이 1막의 최고 명장면이다. 주인공으로 테너를 등장시키지 않았지만 절대적인 존재감을 갖는 단 한곡은 부르게 한 작곡가의 배려가 녹아든 장면이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프란치스코 아라이자, 니콜라이 겟다, 요나스 카우프만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이 배역을 노래해왔다. 옥스 남작에게 옥타비안을 '장미의 기사'로 소개한 마샬린은 옥타비안이 머지 않아 젊은 연인을 찾아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암시하듯 '시간이란 묘한 것(Die zeit, die ist ein sonderbar Ding)을 부른다. 2막은 돈으로 신분을 사 귀족이 된 소피의 아버지 파니날(바리톤 역)의 저택에서 시작된다.
소피와 만난 옥타비안은 마샬린에게 자신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맹세한 것과 달리 눈이 마주칠때마다 묘한 감정에 휩싸이다. 은색 정복과 흰색 드레스를 입은 두 사람이 서로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두 주인공은 마치 왕자와 공주로 보인다. 소피의 시녀 마리안느도 무대에 서 있지만 이 장면에서 마리안느는 마치 증인처럼 몇 걸음 뒤에 서 있다. 둘의 사랑이 이뤄질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영롱한 멜로디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로맨틱하다. 어린 신부 소피를 두고 옥타비안과 한 결투에서 패한 남작 옥스는 여자만 보면 침을 흘리는 호색한의 캐릭터지만 왠지 모르게 측은하다. 슈트라우스는 청혼의 전령과 신부가 눈이 맞는 황당한 장면은 아름다운 음악으로 포장하고, 작중 악역에게는 왈츠 선율의 유쾌한 아리아를 선사해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만들어냈다.

3막의 빈 근교 레스토랑에서 옥타비안은 마샬린에 하녀로 변신해 1인2성별을 노래하며 옥스 남작을 유혹한다. 경찰이 출동해 미풍양속을 해친 죄로 옥스 남작을 체포하려하고 옥타비안의 메세지를 받고 현장에 온 파니날과 소피는 옥스와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한다. 그때 마샬린이 등장하는데 마샬린은 등장만으로도 갈등을 해결하며 마치 '여제'적인 아우라를 뽐낸다. 이어 자신의 젊은 연인이 소피를 사랑하는 것을 눈치채고 둘의 사랑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데 이 장면에서 부르는 3중창 '마리 테레즈(Marie terese)'가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보이는 마샬린과 미안한 마음의 옥타비안, 사랑에 빠진 기쁨을 노래하는 소피까지 세 성부의 여성 성악가가 뿜어내는 고음의 향연은 오페라 장미의 기사 최고의 명장면이다. 마샬린이 떠나고 남은 소피와 옥타비안이 이중창 '이건 꿈일거야'를 부르며 작품이 끝난다.

대구오페라하우스의 오페라 제작 노하우는 한국 최고를 넘어 세계적인 수준에 달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지난해 개·폐막작으로 선보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와 <엘렉트라>에 이어 올해 <장미의 기사>까지 슈트라우스의 3대 오페라를 직접 제작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주인공만 해외에서 초청하고 조역과 단역만 국내 성악가로 구색만 맞춰오던 국내 오페라계 관행을 따르지 않고 한국인으로만 A,B팀 성악가를 캐스팅해 공연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는 세명의 여성 성악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소프라노가 노래하는 마샬린과 소피,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옥타비안이다. 슈트라우스는 3막의 3중창을 염두에 두고 세 명의 성부가 겹치지 않게 오페라를 작곡했다. 리릭 소프라노가 부르는 마샬린은 이 작품을 통틀어 가장 계급이 높은 등장인물로 '행진'을 뜻하는 마쉬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군사령관(마샬)의 부인'이다. 극중 대사로 소개되는 마샬린의 본명 '마리 테레스'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과 비슷하다. 콜로라투라가 노래하는 소피는 13~15세 가량의 소녀로 은장미를 들고 온 '장미의 기사' 와 사랑에 빠지는 순수한 역할이다.
작품의 타이틀롤 '장미의 기사' 옥타비안은 17세의 백작으로 그려졌는데 대부분의 오페라에서 소프라노가 주인공을 맡는 것과 달리 메조소프라노에게 허락된 흔치 않은 주인공 역할이다. 이 외에도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주역 역할로는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의 오를로프스키 왕자가 있는데 이들을 통틀어 독일 오페라의 3대 '호젠 롤레(여성이 바지 입는 역할)'라고 한다.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제작한 오페라 <장미의 기사>는 한국 오페라 역사에 남을만한 웰메이드 작품이었다. 로비에서 만난 연출자 조란 토도로비치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따라 무대에 색을 입혔다"라며 "대사가 많아 청각에만 집중되기 쉬운 독일어 오페라에 시각효과를 입혀 작품성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1막에서 마샬린의 감정에 따라 샹들리에의 밝기가 변하며 극중 주인공의 감정이 관객에게 시청각을 통해 전달되었다. 2막의 소피와 옥타비안이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회색 꽃봉오리 무대장치에 장밋빛이 스며들며 은은한 사랑의 감정이 표현됐다. 3막에서는 과감히 샹들리에를 걷어내고 촛불을 소품으로 사용해 계단무대에서 내려오는 마샬린의 등장신이 마치 신전에서 여신이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출연한 성악가들은 모두 해외 극장의 프로덕션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호연을 보여줬다. 마샬린 역의 소프라노 조지영은 기품 있는 연기로 역할을 잘 소화했다. 이탈리안 테너 역의 김효종은 미성을 뽐내며 어려운 기교의 아리아를 무리 없이 불러냈다. 4일 출연한 옥타비안 역 메조소프라노 김선정은 잘생긴 백작 역의 성악가가 여성이라는것을 잠시 망각하게 할 정도의 호연을 선보이며 1인 2역을 훌륭히 해냈다. 소피 역의 소프라노 이혜정은 깨끗하고 맑은 고음으로 15세 소녀 소피를 노래했고 5일 공연의 소피 박소영도 시원한 고음으로 노래했다. 파니날을 노래한 바리톤 정제학은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성악가였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은건 옥스 남작 역의 베이스 박기현이다. 독일 할레 오페라극장의 종신 성악가 박기현은 이번 공연이 12번째 옥스 역 출연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으로도 품귀 현상인 '옥스'역을 소화할 수 있는 한국 성악가가 있다는 건 국내 오페라계 큰 자산이다. 옥스 남작이 애드립으로 "아 그래 맞나?", "고마 치아뿌라" 같은 대구 사투리를 할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가지 아쉬운건 지휘자 에반 알렉시스 크리스트가 책임을 맡은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슈트라우스의 작품 속 호른 파트는 어렵기로 유명한데 궁정 호른 주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수준 높은 호른 연주만을 들으며 성장한 까닭이다. 이날 반주를 맡은 디오 오케스트라는 최선을 다해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연주해냈지만 서곡을 연주한 후 호른 연주자의 입술이 굳어버린 데서 오는 실수가 연발됐다. 공연이 계속되면서 호른 사운드도 안정감을 되찾았는데 이는 연주자의 컨디션을 무시한 채 서곡의 템포를 빠르게만 연주해 생긴 사고다.
오페라애호가들을 위한 풍성한 잔치는 계속된다. 국립오페라단이 제작하는 리하르트 바그너 오페라<탄호이저>, 대전예술의전당이 제작하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에 이어 아레나의 <투란도트>와 서울시오페라단의 <라 보엠>도 계속된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로 화려한 개막을 알린 대구국제오페라 축제는 오는 11일 비발디의 바로크 오페라 <광란의 오를란도>를 한국 초연한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