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처칠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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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재 정치부장뮌헨회담에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속아 나치 독일의 전쟁 도발을 막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은 건 네빌 체임벌린 당시 영국 총리였지만, 히틀러가 은밀히 독일을 재무장시키며 유럽 정복의 야욕을 키울 수 있었던 데는 전임 총리인 스탠리 볼드윈의 책임이 컸다. 독일은 히틀러가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을 공식 폐기하기 수년 전부터 이미 조약이 설정한 한도 이상으로 해군력을 복원한 데 이어 공군력도 비약적인 속도로 확장하고 있었다.
윈스턴 처칠은 특히 공군력에서의 ‘힘의 균형 상실’을 우려했다. 1934년 공군 예산 증액안을 의회에 제출하면서 “독일은 이미 영국 공군력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강력한 공군을 갖췄고, 1936년쯤이면 독일 공군이 영국보다 강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볼드윈은 “독일의 실질적인 공군력은 영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며, 처칠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고 일축했다.
"2차 대전은 불필요한 전쟁"
볼드윈이 ‘처칠이 옳았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1935년 치른 총선에서 그는 재무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동시에 “대규모의 재무장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국방력 증대를 원하는 사람과 평화주의자의 표심을 모두 겨냥한 것이었다.이런 선거 전략은 적중해 볼드윈은 그해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국내 정치에 능통한 그는 나치의 위험을 알면서도 당시 영국 사회를 휩쓴 평화주의 바람에 편승하는 쪽을 택했다. 옥스퍼드대 학생들이 “어떤 경우에도 국왕과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당이었다. 볼드윈은 이후 “평화주의 바람이 불던 그때 ‘독일이 재무장하고 있으니 우리도 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어느 누가 결집하려 했겠느냐”며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 외에는 확실한 게 없었다”고 자신의 선택이 정치적 판단이었음을 시인했다.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저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만약 1934~1935년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독일의 공군력과 양적 균형만 이뤘어도 히틀러 폭력의 역사를 초기에 좌절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북핵보다 尹 정권 비판하는 野
90여 년 전 처칠의 회한이 떠오른 건 지난 1일 국군의날 기념식을 두고 “예산 낭비” “군사 정권 방불” 등 정부 비판을 쏟아낸 야당과 일부 언론의 모습이 당시 영국 정치인들과 묘하게 중첩돼서다. 야당은 연일 미사일을 쏘고 오물 풍선을 날리는 북한의 도발에는 침묵하면서 ‘대북 억제력’을 보여주기 위한 우리 군의 행사는 폄훼했다.1930년대 나치처럼 북한 정권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시한 채 핵능력을 고도화하고 있다. 힘의 균형을 위해 한·미·일 군사 협력이 필수지만, 야당 원내대표는 국회 연설에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주가 우려된다”며 근거 없는 괴담으로 정부를 공격했다.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이 전쟁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느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질문에 ‘불필요한 전쟁’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1차 세계대전이 남긴 것마저 모두 파괴한 이번 전쟁처럼 방지하기 쉬운 전쟁은 없었다”고 했다. 처칠이 살아있다면 지금의 한국 정치를 어떻게 평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