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40년 잠들었던 필리핀 원전 깨운다

尹, 마르코스 대통령과 정상회담
한수원이 바탄원전 타당성 조사
< 한·필리핀, 수교 75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 격상 > 윤석열 대통령이 7일 필리핀 마닐라 말라카냥 대통령궁에서 열린 한·필리핀 정상회담에서 바탄 원전 건설 재개 타당성 조사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윤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라파엘 로틸리야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 /연합뉴스
40년 동안 가동을 멈춘 필리핀 바탄 원자력발전소 운영을 재개하기 위한 타당성 조사를 한국수력원자력이 맡는다. 필리핀 정부가 바탄 원전 가동을 재개하기로 결정하면 ‘팀 코리아’가 관련 사업을 수주할 가능성이 크다. 동남아시아 지역 원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분석이 나온다.

필리핀을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7일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이 같은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비즈니스포럼에서 “원전 르네상스 시대를 한국과 필리핀이 함께 준비해 나가고자 한다”며 “양국 간 원전 협력이 본격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고, 필리핀에서도 팀 코리아가 최고의 원전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국 정상은 향후 10년간 약 350억달러를 투입하는 필리핀의 ‘군 현대화 3단계 사업’에 한국이 적극 참여하는 데도 의견을 모았다. 아울러 75년 전 외교 관계를 수립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방산·해양 안보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양국 정상은 남중국해 문제도 논의했다. 필리핀과 중국은 남중국해를 두고 영해 분쟁을 벌이고 있다. 윤 대통령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정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공동 번영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며 “규칙에 기반한 해양 질서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지지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북한의 핵 도발과 러·북 군사협력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역내 안보 현안에서 윤 대통령과 뜻을 같이했다.

이와 관련해 남중국해에서 대중국 견제를 위한 전선을 강화했다는 분석도 있다. 필리핀은 지난 4월 미국, 일본과 남중국해에 공동 전선을 꾸리기로 협의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그 정도 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역내 평화와 해양 질서 확보를 위해서 충분히 명분이 있기 때문에 거기(중국을 자극할 우려)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尹 "팀코리아와 원전 르네상스 열자"…마르코스 "韓과 적극 협력"
1986년 이후 가동 못한 바탄원전…韓 '고리 2호기'와 동일한 노형

윤석열 대통령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7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원전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윤 대통령은 “필리핀에서도 ‘팀 코리아’가 최고의 원전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했고, 마르코스 대통령은 “원전과 관련해 한국과 적극 협력하기를 희망한다”고 화답했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쌓은 양국 간 신뢰로 한국 정부가 향후 필리핀 원전 수주에서도 우위를 점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최적의 원전 협력 파트너 될 것”

두 정상은 이날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필리핀 바탄 원자력발전소 재개를 위한 타당성 조사를 한국수력원자력이 수행하도록 하는 내용의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1986년 이후 가동을 멈춘 바탄 원전을 재개하는 데 앞서 경제성과 안전성을 한수원이 조사한다는 내용이다.

바탄 원전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계기로 1986년 준공 이후 한 번도 가동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22년 취임한 마르코스 대통령이 전력난 해소를 위해 원전 도입을 추진하면서 바탄 원전 재개에 청신호가 켜졌다. 그간 두 정상은 두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바탄 원전 재개를 위한 협의를 지속해왔다. 이후 실무 회의를 거친 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MOU를 맺게 됐다.박춘섭 경제수석은 브리핑에서 “바탄 원전은 우리나라 고리 2호기와 동일한 노형이고 한수원은 고리 2호기를 40여 년간 운영해온 경험이 있다”며 “한수원은 바탄 원전의 타당성 조사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역량과 노하우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정부는 타당성 조사 결과를 토대로 바탄 원전 재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타당성 조사 기간은 6개월로 예상하고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과 체코 바라카 원전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사례를 거론하며 “필리핀과 최적의 원전 협력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필리핀은 한국이 추진 중인 무탄소에너지(CFE) 이니셔티브에 대한 지지도 표명했다. CFE는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신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원전, 수소에너지 등 무탄소에너지를 폭넓게 사용하자는 취지의 이니셔티브다.

○“한·필리핀 FTA 조속히 발효하기로”

두 정상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인프라 개발, 원자재 공급망 협력 등에 관한 MOU 20건을 체결했다. 인프라와 관련해선 필리핀의 라구나 호수 순환도로와 PGN 해상교량 건설 사업에 각각 각각 9억500만달러, 10억달러 규모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지원하기로 했다. EDCF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번 사업을 계기로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 한국 기업이 진출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공급망 중단 시 핵심 광물을 상호 지원하는 내용의 MOU도 맺었다. 필리핀은 지난해 기준 니켈 세계 2위, 코발트 6위 생산국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공개된 필리핀 언론 ‘필리핀스타’와의 인터뷰에서 “한·필리핀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무역과 투자가 획기적으로 확대될 것”이라며 “젊고 활기찬 인구구조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필리핀과 제조·첨단산업 분야에서 높은 역량을 갖춘 한국 간 협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밝혔다. 양국 정부는 지난해 9월 한·필리핀 FTA를 체결했고, 지난달 정부는 국회에 ‘한·필리핀 FTA 비준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날 마닐라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필리핀 비즈니스포럼에는 두 정상과 양국 기업인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김동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부회장,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 등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기조연설에서 “필리핀은 한국의 ‘인태전략’과 ‘한·아세안 연대구상’의 핵심 파트너”라며 “필리핀과의 전략적 경제 협력을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마닐라=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