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화가 나혜석, 나는 다만 새벽녘에 우는 닭이 되려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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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은규의 길 위의 미술관 - 나혜석 편▶[나혜석 편 ①] 나혜석의 자화상, 한국 최초 여성화가의 초상에 담긴 근대의 흔적들
④ 여자미술학사와 수덕여관
▶[나혜석 편 ②] 염상섭은 '나혜석의 연애와 결혼'으로 동아일보에 소설을 썼다
▶[나혜석 편 ③] 남성 중심 사회에 반기 든 나혜석 “꽃은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나혜석은 성실하고 열정적인 화가였어요. 작품 활동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를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조선미전) 출품 경력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조선미전은 조선총독부의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1922년에 시작된 공모전입니다. 여기에 유럽과 미국에 체류 중이던 1928~29년을 제외하고는 제1회부터 제11회까지 매회 출품했고 줄곧 수상작을 냈습니다. <천후궁>(1926), <정원>(1931)으로 특선을 하는가 하면 <정원>(1931)은 일본제국미술원 전람회(약칭 제전)에서 입선을 하는 등 실력을 발휘합니다.20세기 초 ‘일본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 1866-1924)가 인상주의와 신고전주의를 절충한 외광파(外光派, Pleinairisme)를 들여온 이래, 이는 일본 아카데미즘의 중심 화풍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에 따라 당시 일본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한국 유학생들은 형태 표현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습니다. 나혜석도 그러한 세대에 속합니다.
나혜석의 조선미전 출품작은 현재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 흑백 도판으로만 남아 있어 색채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탄탄한 구성력과 강한 필력을 보여줍니다. 1928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떠났던 세계 여행은 나혜석에게는 새로운 양식도 배우고 서양 미술과 문화에 직접 접하면서 예술적 역량을 단련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주관적 표현성이 강해지면서 야수파적 감성도 드러냅니다. 형태 중심의 전통적 화풍에서 벗어나려 시도한 결과입니다.1부에서 소개한 <자화상>(1928)과 제9회 조선미전 입선작 <아이들>(1930), 제10회 조선미전 입선작 <나부>(1931) 등을 보면 입체감 표현보다 대상을 단순화시키는 붓질에 주력하고 있습니다.특히 <나부>는 성적 아름다움에 치중하는 기존의 여성 누드화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됩니다. 같은 해 입선작이었던 오지호의 <나부>(1931)와 비교할 때 이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새로운 미술을 연구하면서 활동을 지속했다면 더 좋은 작품들을 남겼을 화가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한편 나혜석은 진보적 관점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빈번히 해 왔으나 초기의 일부 삽화를 제외하고 작품에 사상이 투영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 아직 생소한 유화라는 매체로 이념을 조형화시키기 어려웠고, 서구에도 페미니즘 미술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그러한 회화 표현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김취정, 한국 근대 화단과 나혜석, 2016). 그러나 당시 김용준, 김주경, 오지호를 위시한 국내 미술계가 심미주의, 순수예술론에 경도되어 있었고 미술가 대부분이 그에 기대서 작업을 했던 시대적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1933년 2월 나혜석은 수송동의 일본식 목조건물 2층에 서양화 교육을 위한 미술학원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하여 미술 개인지도를 하는 한편 초상화 주문을 받아 그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미술대학 같은 정규 미술 교육기관이 없어 사설학원이나 사숙(私塾, 숙식을 겸하면서 교육을 하던 곳) 등에서 그림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전반기 본격적 서양화 학습을 위해 나혜석을 비롯해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일본의 미술학교로 유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1910년대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서양화 강습소가 주를 이루었으나, 1920년대가 되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도 늘어나서 경성의 토월미술연구회 강습소(1923), 서화학원(1923-1925), 고려미술원(1924-1925), 평양의 삭성회 회화연구소(1925-1928) 등에서 남녀 일반인이나 청소년 대상 서양화 실기 교육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미술학사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잡지 <삼천리>의 탐방 기사(화실의 개방 – 여자미술학사, 1933. 3.)에는 여성들이 미술을 통해 전통의 구속을 끊어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길잡이가 되겠다는 내용의 ‘여자미술학사 취의서(趣意書)’가 실려 있습니다.이곳은 나혜석이 페미니즘 사상을 실천한 공간이었으나 이혼 사건으로 평판이 좋지 않아 수강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개인 작업실로 주로 사용되었고 운영난으로 곧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기사에는 나혜석이 떨리는 손으로 꺼진 숯불을 다시 피우느라 애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1932년 머무르던 숙소의 화재로 작품이 거의 소실되면서 충격으로 생긴 수전증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여자미술학사가 있던 ‘수송동 46의 15호’ 주소에는 현재 아무 자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OCI미술관 옆 주차장에 표석 하나 없이 빈터로 있을 뿐입니다.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에서 역사의 무게는 아직 가볍습니다. 얼마 전 강원도의 어느 도시에서 60년 된 단관 극장이 오랜 논란 끝에 결국 철거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60~70년대 그 도시에서 보낸 필자의 성장기에 그 공간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올라 아쉬웠습니다. 공간의 가치 판단에서 역사의 비중이 더 높아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나혜석은 역경에 처하면서도 부단히 그림을 그렸으나 1933년부터는 작품의 발표를 중단합니다. 1934년 이혼고백서 사건 이후 주로 잡지 <삼천리> 에 게재되던 세상을 향한 발언도「해인사의 풍광」(<삼천리>, 1938. 8.)을 마지막으로 끊깁니다.
충남 예산군 덕숭산 초입에는 유명한 사찰 수덕사가 있고, 일주문에 살짝 못 미친 왼편에 수덕여관이 있습니다. 수덕여관은 본래 수덕사의 비구니 스님들이 쓰던 절간이었는데, 사람들이 절을 많이 찾게 되면서 쉼터 역할을 하게 된 곳입니다.나혜석은 1937년 무렵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수덕여관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덕사에는 문인이자 잡지<폐허>, <삼천리>등에서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던 동갑내기 친구 김일엽이 수도승으로 있었습니다. 나혜석은 이곳에서 수덕사 주지 만공 스님의 배려로 유화를 가르치기도 하고 해인사, 다솔사 등지를 다니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이응노(1904-1989)가 이때 나혜석에게서 서양화를 배우게 됩니다. 이응노는 나혜석이 떠난 이후 1944년에 여관을 매입해 1956년 프랑스 파리로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고,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복역 후에 잠시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때 남긴 암각화가 지금도 여관 앞 바위에 남아 있어 시간의 덧없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혜석은 1948년 행려병자(行旅病者)로 사망합니다. 1949년에 발행된 <관보> 의 광고란 행려사망(行旅死亡) 중에 그의 사망 사실이 게시되어 있습니다.성명과 연령은 밝혀져 있으나 주소는 미상입니다. 사망 원인은 ‘병사’, 사망 장소는 ‘시립자제원(市立慈濟院, 현 용산경찰서 자리, 현재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 사망 시간은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의 사망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언제 들어왔으며, 어디에 묻혔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53세, 떠나기에 아직 아까운 나이였습니다. 자유연애,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등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은 봉건 사회의 가혹한 거부로 되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촉망받던 국문학자 마광수 교수가 소설<즐거운 사라>(1991) 등을 쓰면서 기성 사회의 도덕적 허위의식에 맞서다 스러져 갔음을 알고 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으려 했던 이들의 최후는 한결같이 쓸쓸합니다.
나혜석의 연애와 결혼을 소재로 신문 연재소설「해바라기」를 썼던 염상섭은 나혜석이 사망한 지 6년 후 추모 글「추도」를 쓰면서 그의 죽음 앞에 애잔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왕이면 좀 더 현세에서 – 현실에서 초연하지 못했던가를 아깝게 생각하면서도 측은한 마음을 이길 길 없다. 그 후의 그의 생활이 어떠했으며 그의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광경이 어떠했는지? 아아, 저 건너다 보이는 언덕길을 혼자서 타박타박 쓸쓸히 기어 올라가는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섰다가, 차차 차차 곱아드는 등성이 길목을 홀떡 넘어서 자취마저 스러진 뒤의 인생 공허와 적막이 자취 없이 가만히 가라앉는 것 같다.”
(염상섭, 추도,『신천지』, 1954. 1.)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서 타박타박 걸어갔습니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 길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길이 생겼다 합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 작가로서, 1세대 페미니스트로서 그가 내디뎠던 첫 발걸음을 우리가 따라 걸으면서 현재의 길이 있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갈증을 달래주는 시원한 물을 길어 마시며 처음 우물을 팠던 사람의 수고로움을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요? 근대미술사의 초입을 살았던 예술가 나혜석이 공간에 남긴 기억을 살펴보는 글을 마무리하며, 그가 앞에 서 있었음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슬픈 마음으로, 홀로 걸어간 그의 어깨를 따뜻이 다독여 주고 싶습니다.
“나는 변변치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시지 않습니까. 무거운 짐을 여러분에게 짊어지우기 위하여 나는 다만 새벽녘에 우는 닭이 되려 할 뿐입니다. 한 걸음 앞설 만한 길잡이가 되어야 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따로 서 가기까지 지팡이가 되면 그만, 그만한 영광이 다시 없을 따름입니다. 나는 가냘프지만 여러분은 굳셉니다.”
(나혜석, 화실의 개방 - 여자미술학사,『삼천리』, 1933. 3.)
최은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