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변독설의 '마왕'이 떠난지 벌써 10년, 그립다 신해철

[arte] 이봉호의 원픽! 재즈 앨범

신해철 앨범 'The Songs For The One'
신해철 5집 앨범 <The Songs For The One> / 사진출처. 예스24
2011년으로 기억한다. 신해철과 마주친 장소는 서울 예술의 전당이었다. 그는 ‘가수 신해철’이 아닌 ‘관객 신해철’로 변신해 있었다. 시작을 알리는 관악기의 음울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이 보였다. 당시 공연은 정명훈 지휘자와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9번. 필자와 친구는 1층 맨 앞자리를 예약했다. 같은 줄에 앉은 신해철은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하려는 말러리안의 형상을 띠고 있더라. 말러는 9번 교향곡을 준비하면서 어떤 색깔의 죽음을 상상했을까.

죽음과 이별에 관한 선율이 객석 구석구석을 부유하던 1악장이 끝났다. 여전히 신해철의 시선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순간 그가 필마단기로 출연했던 [100분 토론]과, 인터뷰집 [신해철의 쾌변독설]과, 인터넷 방송 [고스트 스테이션]이 차례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해철은 필자의 20대를 지배했던 음악인은 아니었다. 잘 짜인 매듭 같은 그룹 무한궤도의 수상 곡 ‘그대에게’도, 그의 솔로 앨범 1집도, 곱상한 아이돌의 유행가요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사진. ⓒ고스트 스테이션
신해철에 관한 생각이 바뀐 계기는 책 <신해철의 쾌변독설>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입한 인터뷰집에서는 가수 신해철과 인간 신해철의 세계가 거침없이 드러나 있었다. 인터뷰어 지승호는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표현했다. 만약 필자가 이 책을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읽었다면 인간 신해철에 관한 관념을 바꾸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을 것이다.

이번에는 책 머리말에 등장하는 신해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내가 뱉은 말들은 신해철 혼자만의 특출나거나 특이한 이론이 아니라, 이 사회의 많은 사람이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나 나의 입을 빌려 튀어나온 것에 불과한 것인 만큼, 독자 제위의 판단은 그저 말하고자 하는 초점에 있기를 바랄 뿐. (중략) 책을 돈 주고 사신 여러분 앞에 무한한 행운이 깃드시길 아울러 졸라 염원한다.’
신해철 관련 서적들 / 사진. ⓒ이봉호
그는 소신과 용기를 두루 갖춘 개념음악인이었다. 신해철은 가수를 무시하는 방송계와, 권위주의를 악용하려는 기성세대와,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추구하는 음악 역시 언급한 변화 속에서 재구성된다. 노래 ‘날아라 병아리’, ‘아버지와 나’, ‘힘겨워 하는 연인들을 위해’, ‘70년대에 바침’ 등은 건조한 세상을 향한 작은 외침이었다. 신해철은 하이틴 스타에서 로커로, 로커에서 의식 있는 예술가로 향하는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는 용자였다.이번 칼럼에서는 신해철의 5집을 골라 보았다. [The Songs For The One]은 부정어와 메타포를 적재적소에 구사했던 그의 어법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앨범 타이틀이다. 게다가 장르는 그가 평소 다루지 않았던 재즈다. 물론 과거 ‘재즈 카페’라는 노래가 있었지만, 신해철의 음악 세계에서 재즈란 가깝고도 먼 음악이었다. 그는 자신이 노래하면서 행복을 느꼈던 첫 번째 음반을 [The Songs For The One]으로 꼽았다.
사진. ⓒKCA엔터테인먼트
[The Songs For The One] 수록곡을 살펴보자. 한국 가수의 리메이크로는 ‘하숙생’, ‘장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가 수록되었다. 가수 최희준의 ‘하숙생’과 ‘장미’는 원곡보다 빠른 템포의 스윙 재즈를 구사하고 있으며,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28인조 빅 밴드의 연주가 리메이크의 어려움을 다소 덜어주고 있다. 무려 6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친 [The Songs For The One]은 시드니에서 6일간 녹음한 결과물이다. 노래 제목처럼 자기 아내를 위한 헌정음반의 형식을 띤 5집은 리메이크 음반으로도 알려져 있다.

앨범에서 가장 재즈의 어법에 충실한 곡을 꼽으라면 ‘A Thousand Dreams Of You’다. 5집의 지향점과 잘 어울리면서도 원곡의 해석이 스윙 사운드와 일체를 이루는 트랙이다. 다음으로는 토니 베넷이 불렀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다. 앨범을 녹음했던 2006년 신해철 특유의 미성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룹 넥스트 시절의 후광에 눌린 탓일까, 아니면 새로운 도전이 재즈 팬과 신해철 팬 모두에게 혼란을 주었던 것일까. 5집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미완의 작품으로 남는다.[신해철 5집 앨범 'The Songs For The One'의 4번 트랙 'A Thousand Dreams Of You']
신해철거리 조형물(동상) / 사진출처. 비전성남
그는 2014년 10월 27일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이룬 것보다 이뤄야 할 것이 많은 자의 죽음이었다. 신해철은 자신의 묘비명을 묻는 말에 ‘매우 재미있게 살다 간 자 여기 잠들었다.’라고 답했다. 정말 그에게 세상은 흥미롭고 변화무쌍한 일종의 놀이터였을까. 아니면 상처와 혼란 속에서 재미라는 역설이 떠도는 슬픈 지옥이었을까. 질문에 관한 답은 자신이 귀천하면 배경음악으로 써 달라는 ‘민물장어의 꿈’의 가사에 담겨 있다. 인간의 욕망과 미련에 관한 고해성사가 ‘민물장어의 꿈’에서 드러난다.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올해는 신해철 사망 10주기가 되는 해다. 인터뷰어 지승호가 신해철을 기억하는 이들의 인터뷰집을 10월 말에 출간할 것이고,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추모 공연이 열릴 것이다. ‘민물장어의 꿈’의 가사처럼 좁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자신을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이라고 속삭였던 마왕. 이젠 버릴 것조차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은 삶이란 질식 사회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리운 마왕, 내 젊은 날의 아름다운 초상이여.

이봉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