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본고장 울린 창극 '리어'…김준수 판소리에 런던 기립박수

국립창극단 '리어'
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서 공연
10월 6일 마지막 공연 리뷰
영국인들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향한 애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런던의 서점에는 셰익스피어 서가가 따로 있을 정도고, 대학 학부 교양 과목으로 ‘셰익스피어의 도시, 런던’이 인기다. 영국 초등학교 영어 수업의 시작점도 셰익스피어. 아이들은 맥베스, 한여름 밤의 꿈을 읽다가 서서히 난도를 올린다. 현장학습으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고어(古語)로 상연하는 역사적인 공간, 셰익스피어 글로브극장을 찾는다. 서점 직원에게 셰익스피어 책을 골라달라고 하면, 눈이 하트로 변한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사랑해. 영국의 보물이야.”라고.

셰익스피어의 나라에서, 그것도 런던의 대표 문화예술 기관인 바비칸 센터에 한국의 국립창극단이 ‘리어왕’을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지난 3일부터 무대에 오른 ‘리어’의 6일 마지막 공연을 찾았다. 공연 관람 전에는 ‘현지인들 반응이 어떨까?”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한국의 판소리와 영어 자막으로 전달하는 대사가 관객들에게 가닿을지, 그리고 셰익스피어 원작에서 틀은 가져왔지만, 동양철학인 노자 사상을 중심으로 한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현지 반응의 관건이었다.
국립창극단 ‘리어’의 작품 구성과 완성도는 듣던 대로 탄탄했다. 극작가 배삼식의 완성도 높은 대본과 연출가 정영두의 군더더기 없고 감각적인 연출, 그리고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판소리 작창가 한승석과 소리의 합을 맞춰 극을 완성했다. 국내 최고의 소프트 파워가 힘을 합쳐 완성한 결과물이다.

극은 2막 20장으로 180분간 펼쳐진다. 전체 극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물’이었다. 작가와 연출가는 삶의 비극과 인간 본성에 대한 원작의 통찰을 노자 사상으로 연결, 노자가 깨달음을 얻은 물상인 '물'을 작품 전반에 배치했다. 400여 년 전 셰익스피어가 통찰한 인생의 서늘함은 물의 푸른색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실제 바비칸 센터 무대 위에도 20t의 물이 채워졌다.

극의 시작부터 사람 목소리가 아닌 물소리였다. 서늘한 푸른 물빛, 인물들이 움직일 때 내는 출렁이는 물의 소리는 도입부를 압도했다. 침묵도 대사가 될 수 있다는 건 리어의 연출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배우들은 공연 내내 물을 첨벙거리고 물에 빠지는 식의 연기로 불안정한 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했다.
무대 위에 공감각적으로 펼쳐진 ‘물’ 외에도 노자 사상을 표현한 새, 물고기, 하늘, 바람 등 자연의 이미지는 작품 전반에 모티브가 되었다. 여기에 북소리 기반의 판소리에 서양의 현악기 소리가 얹히고 때때로 서늘한 엠비언트 사운드까지 결합하여, 창극 리어에서만 볼 수 있는 ‘소리’가 창조되었다. 정재일 음악감독은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어우러진 13인조 구성으로 음악을 선보였다.

물소리로 말을 거는 도입부, 동서양 조합의 새로운 음악, 한국 판소리의 발성까지. 원작의 완벽한 재창조 버전임을 일찌감치 알아챈 관객들은 창극 리어에 깊이 빠져들었다. 큰 틀에서 스토리는 원작과 같지만, 표현은 K 스타일이었다.

권력욕을 놓지 못하는 리어, 왕위를 이어받고 리어를 배신하는 두 딸, 거너릴과 리건, 두 눈이 뽑힌 뒤에야 진실을 깨닫는 글로스터, 음모로 지위를 쟁취하는 서자 에드먼드. 그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참혹한 삶을 살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두 딸의 배반 이후, 정상적인 상태로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리어는 “나는 미칠 것 같구나. 나는 미치고 싶지 않다. (I feel I’m going mad. I don't want to go mad)”고 울부짖는다. 리어를 맡은 소리꾼 김준수의 호소력 짙은 대사는 언어를 뛰어넘어 깊은 울림을 줬다. 두 눈을 뽑히고 방황하는 글로스터를 만난 리어가 “차라리 세상 더러운 꼴 안 보는 게 낫다”고 말하는 장면이나, 피눈물을 흘리는 글로스터에게 “나를 위해 우느냐? 내 눈을 가져가라.”라고 말하는 대목은 현지 관객들도 크게 반응했다.

대사는 원작과 다르지만, 삶에 대한 통찰은 맥락이 통했다. 작품 전반에 걸쳐 ‘삶은 고통’이라는 인식, 인간을 믿지 말라는 호소, 결국 인생의 끝은 소멸이라는 회한이 쏟아진다. 리어를 비롯한 어리석은 인간들은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지만, 결국 그 욕망의 끝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리어의 "이 고요를 위해, 적막을 위하여, 그 모든 소란이 필요했던가. 보라, 저 하늘가 흐르는 구름의 묘비”라는 마지막 대사가 긴 여운을 남겼다.
시종일관 침울한 비극이지만, 광인이 되어 들판을 떠도는 리어의 곁을 지키는 광대가 등장하면 곳곳에 웃음이 터졌다. 리어와 광대는 아이처럼 물을 첨벙거리고 우스꽝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놀았다. 1막 4장에서 광대가 부르는 노래는 '장기타령' '배치기'를 활용해 유쾌하게 풀어냈다.3시간이 넘는 공연이 끝난 후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공연장을 메운 관객들이 대부분 영국 현지인이었던 걸 감안하면, 반응은 뜨거웠다. 객석에서 만난 미셸은 “정말 놀라운 공연이었다. 감정에 너무 빠져들어서 심신이 지쳤다. 집에 가서 푹 쉬어야 할 것 같다”며 “이런 형태의 공연은 처음 봤는데, 완전히 새로운 리어였다. 감정의 울림이 압도적이었다”고 극찬했다. 작품이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아득바득 버티듯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향한 연민을 담고 있기에 객석은 함께 슬퍼하고 아파했다. 눈앞의 비극은 때로 객석의 탄식으로 공간을 울렸다.
사진. ⓒ조민선
또 다른 관객 에밀리는 원작과 비교하면 어땠냐는 질문에 “색다른 리어였다. 재창조에 가깝지만 전하려는 메시지는 와닿았다”며 “특히 무대 위에 실제 물이 차고, 빠지는 무대 연출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어 말맛이 완벽하게 전달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현지 관객들은 음악과 이미지로 작품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영어 자막이 어떠냐는 질문에 “이해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간결하면서도 주제가 와닿았다”고 했다.

현지 언론들도 대체로 호평을 내놓았다. 한 언론은 “판소리는 서양 관객들에게 매우 낯설 수 있지만, 물을 사용한 무대 장치와 정재일 감독이 만든 독특한 K 음악이 큰 인상을 남겼다”고 썼다. 또 다른 언론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대사와 달라서 아쉽지만, 극의 시각적 연출은 정말 매혹적이었다”고 평했다.
사진. ⓒ조민선


'리어'는 주영한국문화원이 여는 'K-뮤직 페스티벌'의 개막작이다. 국악부터 재즈, 클래식까지 다양한 한국 음악인을 소개하는 K-뮤직 페스티벌은 다음 달 23일까지 이어진다. 런던=조민선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