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슬라'로 불렸던 강릉에 톡쏘는 '아트월드'가 들어섰다

[arte] 최영식의 찾아가는 예술 공간

고구려 신라 시대부터 불리던
강릉의 옛 이름 '하슬라'

조각가 부부(박신정 & 최옥영)가 오픈한 힐링예술공간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을 예술로 품은 '하슬라아트월드'

미술관, 카페, 호텔, 공원 모두 갖춘
현대적인 해변 복합 건물
드라마 '모래시계' (1995) / 사진출처. © SBS
강릉 정동진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90년대 드라마 <모래시계>를 생각할 것이다. 해변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모래시계, 누구나 한 번쯤 본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방영된 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이제 정동진은 모래시계뿐만 아니라 ‘하슬라아트월드’라는 새로운 장소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드라마 속 상징을 넘어서, 예술과 자연이 어우러진 현실의 공간을 찾아가 보자.
하슬라아트월드 전경 / 사진출처. © HASLLA ART WORLD
‘하슬라아트월드’에 도착해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바다와 지평선이 맞닿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마치 동해 바다의 연장선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내부와 외부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어, 미술관이 마치 원래부터 이 바다의 일부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한 하슬라아트월드 포토존 / 사진출처. © HASLLA ART WORLD
‘하슬라아트월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전형적인 미술관과는 다르다. 이곳은 관람객들이 단순히 예술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체적으로 공간을 즐기고 자신만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공간이다. 곳곳에 마련된 포토존은 관람객들이 이 공간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경험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슬라아트월드를 방문한 관람객 / 사진. © 최영식
이곳을 찾는 이들 중엔 등산복을 입고 약간의 음주 상태로 방문하는 관광객도 있다. 어쩌면 미술관에선 좀 독특한 광경일 수 있지만, 이게 바로 ‘하슬라아트월드’가 추구하는 편안함 일지도 모른다. 근엄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자유롭게 예술을 즐기는 공간. 이곳만의 매력이다.
최옥영 작가의 'THE RED' / 사진출처. © HASLLA ART WORLD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최옥영’ 작가의 ‘THE RED’는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하며 커튼 뒤에 숨었을 때 느꼈던 그 편안함을 떠올리게 한다. 붉은 실로 이루어진 공간은 마치 보호막처럼 관람객을 감싸 안는다. 그 속에서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은 나만의 작은 공간에 숨은 것 같은 기분이다. ‘최옥영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관람객이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평온을 느끼기를 바란다.[하슬라 tv] 하슬라아트월드 최옥영 작가의 RED
하슬라아트월드 화장실 / 사진. © 최영식
하슬라아트월드에는 관람객을 위한 또 다른 비밀 공간이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이곳 화장실에는 거울이 없다.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사실 이는 세심한 배려다.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보지 않게 함으로써 작품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작은 디테일 같지만, 이걸 알게 되면 '화장실마저도 작품 같은 공간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전시관이 아닌, 벽으로 옮겨진 에곤 쉴레의 작품 / 사진. © 최영식
미술관과 관람객의 소통과정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다. 전시장 2관에 전시된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은 학생들에게 외설적이라는 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복도로 옮겨졌다.
하슬라아트월드 야외 조각공원,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이 있는 바다 정원 / 사진출처. © HASLLA ART WORLD
또 야외 조각공원에 전시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들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데, 풍만한 몸매를 본 관광객들이 재테크 여신으로도 부른다. "여기까지 와서 다산의 여신을 보고 가네"라는 농담을 던지며 감상하는 것, 이것이 하슬라가 전하는 유머다.
주혜령 작가의 '거북이' / 사진. © 최영식
자유로운 관람을 추구하다 보니 뜻밖의 문제도 생겼다. 주혜령 작가의 '거북이' 작품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너무 많아 종종 파손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처음엔 100마리의 거북이가 있었지만, 이제는 몇 마리만 남아있다. 미술관은 이 상황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며, 관람객에게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작가에게 보수를 부탁한다. "거북이가 또 탈출했어요!" 같은 이야기가 오갈 정도라 할까?

취재를 도와준 ‘이남일’ 차장은 “혹시 대여한 작품이라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다행히 하슬라아트월드의 전시작품들은 모두 소장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가족 단위 관람객이 작품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고, 거북이에게 일어난 작은 '사건'들도 미술관의 일상처럼 받아들여진다. 작품들도 여행객과 마찬가지로 고난을 겪는 셈이랄까?
하슬라아트월드 오션스퀘어 / 사진출처. © HASLLA ART WORLD
하슬라아트월드 스카이워크 최옥영 작가의 '은색 파도' 작품. 마치 자라나는 '철 대나무'와 같다. / 사진. © 최영식
하슬라아트월드의 또 다른 매력은 '완성'된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스카이워크'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이곳은 멈춰 있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이 성장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작가들이 철 파이프를 용접하며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어제 붙인 파이프에 오늘 또 새로운 파이프를 덧대며, 공간은 매일 조금씩 변화한다. 작가들이 농담으로 “내가 예술가인가, 아니면 용접공인가?”라고 말할 정도다. 작품은 마치 하루하루 자라나는 ‘철 대나무’처럼, 생동감 넘치게 뻗어간다.

그래서 만약 내년에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올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스카이워크를 보게 될 것이다. 마치 미술관에 매년 새 옷을 입혀주는 느낌이랄까?

[하슬라 tv] 하슬라아트월드 - 은빛 파도
유타카 카미야마 작가 '하늘을 나는 고래' / 사진출처. © 최영식
하슬라뮤지엄에는 특별한 고래가 있다. 일본 작가 유타카 카미야마의 <하늘을 나는 고래>다. 이 고래는 바다가 아닌 하늘을 헤엄친다. 고래는 다른 물고기들처럼 알을 낳지 않고, 폐로 숨을 쉬며 바닷속 생물들과 조화롭게 살아간다. 조금 독특했던 변호사 ‘우영우’가 사랑했던 고래의 자유가 바로 이런 모습일까? 예전 선배들이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를 부르며 자유를 꿈꿨다면, 하슬라뮤지엄의 고래는 지금 우리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다. 이곳에 딱 어울리는 존재다.

정동진은 경포대만큼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하슬라아트월드’ 덕분에 조금씩 주목받고 있다. 이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여행 코스를 계획하며 방문한다. 인근 명소와 묶어 여행하는 경우가 많아, ‘하슬라아트월드’는 지역 경제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지역과 함께 호흡하는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가 시간이 흐름을 상징하듯, ‘하슬라아트월드’도 자연과 예술이 끊임없이 변하면서 시간을 보여준다. 그 변화에 나도 한 발 담가서 특별한 추억을 남겨보는 건 어떨까?
하슬라아트월드 실내 / 사진출처. © HASLLA ART WORLD
[하슬라 tv] 강릉 하슬라아트월드 전경


최영식 칼럼니스트